<편집자 주> 약이 없어서 죽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죽는다는 환자들의 절규. 그러나 의약품을 둘러싸고 어떤 문제들이 있어 약이 필요한 사람들이 먹을 수 없게 됐는지를 알기란 쉽지 않다. <인권오름>은 한국에서 의약품 접근권 운동의 출발점이 된 의약품 '글리벡'이 주인공이 되어 들려주는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의약품의 연구, 개발, 생산, 공급의 전 과정을 짚어보고 있다. 원래 4회 예정으로 연재를 시작했으나 내용이 많아 다음 주 5회를 연재하면서 기획을 마무리한다.
절실한 필요는 때론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해. 최초의 표적항암제로서, 기적의 치료제라 불리는 나에 대한 환자들의 절실함은 노바티스의 무기가 되어 오히려 환자들의 목을 겨누게 되었다. 수요와 공급이 만나 균형이 조정되는 시장 따위는 이 바닥에 존재하지 않아. 수요와 공갈협박이 만나 균형이 조작되는 시장이 존재할 뿐이지.
2001년 6월 노바티스는 25,005원을 내야만 환자들이 나를 만날 수 있다고 선포했지만, 한국 정부는 11월에 내 가격을 17,862원으로 고시했다. 노바티스가 이 가격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한 짓이 뭔 줄 알아? 바로 ‘공급 중단’이었다. 약이 약장 속에 모셔 놓으라고 만들어진 것은 아닐 텐데, 나는 데뷔하자마자 소속사에 의해 감금된 거지! 환자들은 내가 세상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나를 구경하지 못한 채, 말 그대로 피가 마르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지. 세상에 이런 패륜이 어디 있어! 그 때는 정말 나와 내 팬들보다 더 기막힌 팔자를 가진 이들이 또 누가 있을까 싶었어. 그런데 세상에…… 있더라고!
‘공급 중단’이라는 무기
푸제온(Fuzeon)이란 내 친구는 벌써 4년 째 소속사인 로슈(Roche)한테 감금당했다. 푸제온은 HIV/AIDS 치료제인데, 기존 에이즈 치료제에 내성이 생긴 환자들이 사용하는 약이야. 2004년 5월 식약청에서 시판 허가가 난 이후, 로슈가 요구한 푸제온의 가격은 무려 43,235원. HIV/AIDS 감염인들은 ‘칵테일 요법’이라고 보통 세 가지 이상의 약물을 병용하며 치료를 받아. 그러니까 푸제온 말고도 돈 쓸 일 많은데, 푸제온과 병용요법을 사용하게 되면 연간 약제비가 기존의 비용(약 1,000만원)보다 3배 가까이 치솟게 되는 거다. 게다가 한국보다 국민소득(GNI)이 두 배가 넘는 미국에서 팔리는 푸제온 가격이 19,806원(Big4 보험 공급가)이야. 그래서 한국 정부는 2004년 11월 푸제온을 1병당 24,996원으로 보험등재를 했지. 그랬더니 로슈가 노바티스를 따라 한 짓거리가 또 ‘공급중단’이었다.
당신은 그런 병 평생 걸리지 않을 거니 상관없다고? 사람은 병을 차별하지만, 병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 요즘 매일 뉴스에 나오는 조류인플루엔자(AI)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야. 1918년에서 1919년 사이에 무려 5천만 명의 희생자를 낳은 ‘스페인 독감’ 이래 최악의 대 유행병(pandemic)이 될 거라고 예측하고 있지. 현재 이 조류인플루엔자의 유일한 치료제인 ‘타미플루(Tamiflu)’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제약회사가 바로 저 로슈다. 만약에 로슈가 한국이든, 어디든 가격이 맞지 않아서, 타미플루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강짜 부린다고 생각을 해봐. 끔찍하지? 한국의 HIV/AIDS 감염인들에게는 이미 잔인한 현실이야.
내가 아는 한 HIV/AIDS 감염인은 푸제온이 한국에 보험 등재된 그 2004년에 모든 에이즈 치료제에 내성이 생겼다. 그래서 내 친구 푸제온은 득달같이 그에게 달려가려고 했지. 그런데 로슈가 갑자기 푸제온을 막아서는 거다. 로슈가 푸제온을 감금시키는 바람에 그는 지난 4년 동안 극심한 신체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어. 지금은 다행히 외국의 원조단체를 통해 푸제온을 만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미 한 쪽 눈은 실명이 되었고, 한 쪽 다리의 신경이 말을 듣지 않아 절룩거리며 걷고 있어. 서울의 삼성역 3번 출구에 한국 로슈가 떡하니 사무실 차려놓고 있는데도 푸제온이 그 분을 만나기까지는 4년의 시간이 걸린 거야.
감금 상태의 나를 풀어줄 열쇠
2001년 노바티스, 2004년 로슈의 ‘공급중단’ 선언에 대해,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까?
내가 없으면 살 수 없었던 환자들은 나를 만나기 위해 결국 2002년 1월 나에 대한 ‘강제실시(Compulsory License)’를 청구했어. 강제실시란 특허권자, 그러니까 나의 소속사인 노바티스가 아닌 제3자가 정부의 승인을 얻어 나와 같은 약을 생산‧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야. 병마와 싸워야 하는 환자들은, 병마와 싸우기 전에 우리들의 소속사인 제약회사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거지. 그들은 제약회사와 내가 맺은 그 끔찍한 종신고리대 계약을 무효화하고 나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강제실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거다.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나를 만나려 하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며 난 가슴이 벅차서 그만 눈물을 뚝뚝 흘렸어.
이제 감금상태의 나를 풀어 줄 수 있는 열쇠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한국 정부의 손에 놓인 거야. 그 결과는? 한국 정부는 환자들이 그 손에 꼭 쥐어준 열쇠가 필요 없다며 저 멀리 던져버렸어. 나와 환자들은 경악했지. 다 차려준 밥상을 걷어차도 유분수지,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따지니, 이 정부가 한다는 이야기 참 가관이었지. “강제실시라는 것이 있는 줄 몰랐다. 게다가 이건 특허를 침해하는 것 아니냐?” 듣자하니 당시 환자들이 강제실시 청구하기 위해 특허청에 갔을 때, 그 곳에는 관련 서류조차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더군.
강제실시는 최소한의 권리이자 의무
강제실시는 한국의 특허법(제107조)뿐만 아니라, TRIPs 협정(무역관련 지적재산권 협정) 제31조에도 규정되어 있는 합법적 조치야. 특허를 침해하는 ‘듯한’ 강제실시를 특허와 함께 인정하는 것은 일견 모순되어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강제실시는 특허에 대한 침해가 아니야. 특허권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특허를 실시(특허발명을 그 발명의 내용에 따라 사용하는 것)하는 것에 대해 특허권자가 고소할 수 없도록 ‘소극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일 뿐이지.
강제실시 때문에 특허권자의 권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권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강제실시권자로부터 대가를 받거든. 그러니 강제실시는 특허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특허에 ‘제한’을 두는 제도이지. 그렇다면 왜 특허를 제한할까?
특허를 비롯한 지적재산권 제도는 ‘만들어진 권리’야. 이건 다른 기본권들과 비교해보면 명확해지지. 이를테면 표현의 자유는 기본권이지만, 이 기본권은 10년 동안만 누릴 수 있다고 제한을 두지는 않아. 거주‧이전의 권리를 평생 5회로 제한한다는 말 들어본 적 있어? 하지만 특허나 저작권과 같은 것은 누릴 수 있는 기간이 각각 20년, 50년으로 정해져 있다. 보호기간도 과거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어나긴 했지만 보호 기간이 정해져 있고 그 기간조차 임의적으로 조정할 수 있지. 왜 그럴까? 지적재산권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는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야. 문화와 과학기술의 발전과 공유를 통해서/위해서 만들어진 권리이기 때문이야. 어느 과학자가, 음악가가 태어날 때부터 손바닥에 약물의 분자구조식이나 악보를 적어놓고 나왔겠어? 사회가 그에게 제공한 문화와 과학기술, 다른 이들의 발명이나 창작을 보고 배우면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거지.
강제실시는 이처럼 사회적 합의로서 만들어진 권리일 뿐인 지적재산권이 인간이면 당연히 누려야 할 ‘생명권’을 위협하는 부조리를 막기 위해 고안된 거다. 의약품은 그 부조리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경우지. 의약품 강제실시를 통해 특허권자만이 생산할 수 있는 약을 다른 사람이 생산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이유는, 어떤 약을 생산할 수 있는 제약회사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상 만인의 의약품에 대한 경제적 접근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강화되는 지적재산권 제도 속에서 강제실시라는 이 소극적 허용만이 특허의약품을 환자에게 안정적이고 싼 가격에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어. 동시에 정부가 자국민에게 의약품을 공급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이자 의무인 거고.
열쇠를 쥐고 싸운 태국의 감염인들
그래서 제 3세계 국가들은 강제실시가 뭔지도 몰랐던 한국 정부와 달리, 강제실시에 대한 규정과 범위를 넓히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결과 2001년 11월 14일 카타르 도하에서 “TRIPs협정 중 어떠한 것도 WTO(세계무역기구) 회원국들이 각국의 공중 보건과 관련된 조치들을 채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선언문이, 80개국이 넘는 제 3세계 국가들의 강력한 연대로 채택되었지. 신자유주의의 최첨병이라 불리는 WTO조차도 “의약품에 대한 접근성 확보를 비롯한 공공의 건강 보호가 제약회사의 특허권 보호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승리였어.
물론 TRIPs의 초안을 만들었던 제약회사들과 이들의 대변자인 미국과 같은 나라들은 강제실시의 규정을 최소화시키려고 하고 있지. 2007년 초 태국 정부가 강제실시권을 발동했을 때도 녀석들의 패악은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을 정도였다니까.
태국은 국민 100명당 1명이 HIV/AIDS 감염인이야. 하지만,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에이즈 치료제는 비싸기로 유명해. 비싼 에이즈 치료제를 구입해서 공급하기가 어려운 태국정부는 2007년 1월, 머크(Merck)사의 에파비렌즈(Efavirenz)와 애보트(Abbott)사의 칼레트라(Kaletra)에 대해 강제실시권을 발동했어. 그러자 미국정부와 제약회사들은 무역보복, 의약품 공급 중단 등으로 태국 환자들을 위협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어. 애보트는 심지어 태국에서 판매되는 자사의 모든 제품을 시장에서 철수하겠다고 으름장 놓았지. 하지만 태국 정부가 강제실시를 철회하지 않고 버텼어. 결국 2007년 4월 애보트는 태국을 비롯한 40여 개국에서 칼레트라의 가격을 연간 2,200달러에서 1,000달러로 인하해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말이 무슨 소리겠어? 애보트가 지금까지 전 세계 에이즈 환자들을 대상으로 1인당 연간 1,200달러의 폭리를 취해왔다는 이야기인 거야!
지난번에 내가 마지막으로 한 질문 기억나? 이론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면, 현실을 이론에 꿰어 맞춰야 할지, 이론을 현실에 맞게 뜯어 고쳐야 할지. 답이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어? 우리들의 소속사가 연구 개발에 대한 보상이네, 혁신을 위한 투자네 뭐네 하며 떠들어 댔던 온갖 논리들이 결국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애보트가 제대로 보여준 거지.
한국의 백혈병 환자들이 나에 대해 강제실시를 청구한 이유를 알겠지?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그 열쇠를 고민 없이 내동댕이쳤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 그래도 어찌어찌 감금에서 풀려나기는 했는데 그 얘기 하려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억울하고 씁쓸한 얘기는 다음 주에 이어가겠다.
덧붙임
강아라 님은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홍지 님은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