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읽은 책은 우연히 구한 잉카 전설집 ‘마법의 도시 야이누’입니다. 흔히들 역사는 강자들의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강자들의 삶이 있다면 약자들의 삶 또한 있기 마련입니다. 약자들의 삶은 기록되어 역사가 되지 못했다 뿐이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약자들의 삶은 공식적인 역사로 남지 못한 탓에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근근이 전해질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전설이나 민담을 보면 그 민담을 만든 약자들의 사고방식들이 잘 녹아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백인에 의한 아메리카 침략사도 결국 ‘백인들이 어떻게 침략했는가’에 중점을 둘 뿐이지, ‘그 곳에 원래 살고 있던 사람들의 사고방식 같은 삶의 양식’들에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잉카인들의 삶 역시 공식적인 역사는 선교사들에 의해 사라졌지만, 침략자들의 언어인 기독교적인 부분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나마 전승되어 왔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케추아 족에서 전해지는 악마는 ‘수파이’라고 불리는데 그들은 하얀 피부에 노란 머리, 파란 눈을 가지고선 사람들을 탐욕으로 꼬드겨선 자신들의 금광에서 평생 도망치지 못하고 노예로 일하게 만드는 짓을 합니다.
또 안데스에서 믿는 예수는 신부들이 말하는 예수와는 다른 예수입니다. 예수가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만 태어난 게 아니라 다양한 시대 다양한 장소에서 태어나 민중봉기를 일으키고는 지배자들에게 처형당하는 존재입니다.
이렇듯 이들의 전설은 때로는 슬프고 분노에 찬 하지만 차마 기록해서는 안 될 일을 기억하거나 약자들이 어떻게 저항해갔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기독교 신화의 요소를 빌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놓치지 말았으면 하는 것
분명 전설의 내용 중에는 반여성적으로 읽힐만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설에서 놓치지 말았으면 하는 부분은 강자들이 역사를 독점하는 와중에서도, 자신들의 삶을 전파시키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약자들의 말하기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들의 삶을 기록하는 것을 허가받지 못했기에 교묘하게 우회시켜서 지혜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 이들은 ‘많은 걸 배우지 못한 약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한국은 어떤가요? 우리의 삶을 기억하고 전파하는 일을, 우리들은 많이 배운 강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뭔가를 말하고는 싶지만 언제나 말하지 못한 채, 혹은 강자들에게 삶의 기록을 대신 맡기고선 욕구불만인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약자들의 전설을 보면서 배우지 못한 약자들이야말로 복잡한 거짓말로 약자를 억압하는 세상을 직관과 통찰로 꿰뚫는 힘이 약자들에게 있지 않나요? 그걸 자신의 소통 방식으로 전달하는 힘 말입니다. 저는 이 책의 말하기 방식에서 자신을 설명할 방법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약자들에게 강자들의 거짓말을 꿰뚫을 수 있는 통찰이 있다는 가능성을 읽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하는 능력을 빼앗긴 채로 강자들의 기록에만 의존하기를 강요받아온, 그러나 마음 한 켠엔 약자들끼리 서로 공감하고 싶은 응어리가 남아있는 모든 이들에게 직관과 통찰의 새로운 가능성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전설을 기록했던 케추아 원주민들은 지금 이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의 약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덧붙여서 더 자세한 자료를 원하시는 분들께
이 책은 굉장히 미비한 자료를 담고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한 남미 전설을 원하신다면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불의 기억』을, 그리고 그보다 좀 더 자세한 자료를 원하신다면 같은 작가의 『수탈된 대지』를 추천합니다.
덧붙임
이반 님은 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백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