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센 어른들은 어린이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 초콜릿, 사탕을 억지로 빼앗아 내고 대신 영양소 좋은 음식들을 억지로라도 먹이기 위해 애쓴다. 그것이 아이의 ‘미래’를 위해 좋은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현재’ 괴롭다. 당장의 욕구를 거부당하고 억지로 맛없는 그것을 먹으며 고통스럽다. 그런 어린이들 마음은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편식하는 마음은 나쁜 마음이라 생각하는 어른들은 영양소를 제대로 갖춘 음식을 억지로라도 몸속에 밀어 넣어야 잘 자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항상 어른이 이기는 것은 아니다. 음식을 목으로 넘겨 삼키는 것은 결국 당사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입을 꾹 다물어 버리거나, 몰래 뱉어 버리거나, 숨겨 두었다 버리면 그만이다. 싫은 것을 억지로 먹는 어른이 없는 것처럼, 싫은 것을 억지로 먹을 수 있는 어린이도 없다. 그래서인지 먹거리를 가운데 둔 실랑이는 어른과 어린이 모두를 지치게 만드는 일이 된다. 억지로라도 먹이려는 어른과 절대 억지로 먹지 않으려는 어린이 사이에서 말이다.
영양소 충족의 편에 섰을 때
하인리히 호프만의 『더벅머리 페터』(1845)에 나오는 「먹지 않는 아이 이야기」는 아이에게 겁을 주어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먹도록 하는 ‘처방’을 내린 대표적인 작품이다. 억지로 먹이는 것보다는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주어 스스로 숟가락을 들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잘 먹지 않으면 잘 자라지 않는다는 식의 전략은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쉽게 쓰는 방법의 하나다. 제대로 먹지 않으면 콩알처럼 작아질 것이라든지(『편식쟁이 마리』), 잼만 먹다가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을 기회 역시 얻지 못할 것이라는 은근한 협박 (『프란시스는 잼만 좋아해』)을 한다. 그 외에도 골고루 먹지 않으면 키가 크지 않고, 힘이 세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교육용 그림책에서 너무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흔한 이야기가 됐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 전략에는 ‘키가 크고’, ‘힘이 센’ 주류 강자로 자라야 한다는 내밀한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커지고 작아지는 비약적인 이야기가 아이들을 즐겁게 간질이면서도, 작고 약한 것보다는 크고 힘센 것이 ‘좋은 것’이라고 내면화하게 한다. 단지 ‘건강’을 위해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위너’가 되기 위해 먹어야 하는 것이 된다.
키카 크고, 힘이 세야 한다고 하는 가치를 품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변해야 할 것은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가 된다. 잘 먹지 않는 어린이만 문제가 된다. 하인리히 호프만의 「먹지 않는 아이 이야기」를 보면, 아이의 몸은 크고 퉁퉁한 것에서 작고 가느다랗게 변하지만 아이에게 주어지는 스프는 바뀌지 않는다. 네 컷의 그림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같은 스프가 같은 식탁 위에 놓여 있다. 그 스프는 아이가 죽은 무덤 위에까지 놓여 있다. 아이가 좋아 하는 음식을 찾아본다든가, 좋아하도록 돕겠다는 의도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먹거나 먹지 않거나, 선택은 두 가지 밖에 없다. 어른과 어린이 사이 팽팽한 갈등의 해결이 소통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손에 쥐고 있는 어른에 의해 일방적으로 ‘처리’된다. 어린이의 욕구나 마음에 대한 이해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욕구 충족의 편에 섰을 때
크리스틴 슈나이더의 『밥 먹기 싫어』(그린북)는 아이의 욕구 편에 서서 음식을 둘러싼 어린이와 어른 사이의 팽팽한 겨루기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밥을 차려주는 사람이 엄마가 아닌 아빠라는 것에서 전형성을 벗어나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이 책에는 초록스프보다는 분홍스프를, 흰 우유 보다는 파란 우유라면 더 잘 먹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아이가 등장한다. 아빠가 준 음식을 몰래 화분에 버리면서, 화분이 잘 자라길 바란다고 능청을 떤다. 음식물을 몰래 버린 것을 들켜 크게 혼난 후 새롭게 깨닫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더라가 ‘편식 이야기’의 전형인 것에 반해, 이 책의 마지막까지 아이는 아빠가 준 스프를 절대로 먹지 않는다. 아이는 싫어하는 음식을 버리며 자기가 원하는 것에 대한 상상을 멈추지 않고, 아빠는 아빠대로 자기가 주고 싶어 하는 음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기 대신 잘 크고 있는 화분을 보라며 아빠의 시선을 돌리는 것에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밥 먹기 싫어』는 아이가 원하지 않는 음식을 먹지 않는 요구를 그대로 보여주긴 했어도, 결국 자기가 원하는 형태로의 식욕은 충족하지 못했다. 욕구를 충족하는 것과 충족하지 않는 그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아리송한 이야기로 끝을 맺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큰 쾌감을 주는 책은 되지 못한 것 같다.
로렌차일드의『난 토마토 절대 안 먹어』(국민서관)는 편식하던 아이가 편식하지 않게 되는 이야기의 전형을 따르고 있지만, 접근 방식이 다르다. 먹지 않으면 키가 크지 않고 힘이 세지 않을 거라고 협박하지 않는다. 음식에 대해 새로운 욕구를 만들어 내기 위해 애를 쓴다. 당근은 ‘오렌지뽕가지뽕’, 콩은 ‘초록방울’, 토마토는 ‘달치익쏴아’, 감자는 ‘구름보푸라기’, 생선튀김은 ‘바다얌냠이’가 되어 다가간다. 재미도 없고 맛없는 채소가, 재미있고 신비한 것으로 탈바꿈했다. “난 토마토는 먹지 않아, ‘달치익쏴아’만 먹을 뿐이지.”라며 먹어볼 마음을 갖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마음을 가져본다’는 것이다. 강요하거나 억지로 먹도록 하지 않는다. 채소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유머와 상상력을 아이들 앞에 선물처럼 늘어놓았다. 혀끝을 달콤하게 만들어 주는 먹거리는 아니지만,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기분이 달콤한 음식이 되었다. 새로운 즐거움을 창조하여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
유은실의 『나도 편식할 거야』(사계절)에는 닭발에 녹용까지 맛있게 먹는 아이가 등장한다. ‘편식’이라는 제목을 달고 편식하지 않는 아이가 나왔다. 그렇다고 잘 먹는 아이를 내세워 잘 안 먹는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목적을 갖지도 않는다. 이런 아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라면 무조건 편식을 할 것이고, 억지로라도 먹여야 한다는 생각에 이의를 걸어볼 수도 있겠다. 감자탕의 뼈다귀까지 아주 잘 발라 먹는 주인공 정이는 모든 ‘맛’에 열려 있는 아이다. 그런 정이에게 먹기 싫은 음식을 ‘버리는’ 짝꿍이 있고, ‘편식쟁이’ 오빠가 있지만 정이를 ‘본받아’ 아무거나 다 잘 먹게 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먹을 것에 열려 있고, 먹을 것을 좋아하는 정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은 대로 먹도록 욕구를 충족하는 이야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이가 건강하기 위해 아무거나 다 잘 먹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맛있기 때문이고, 즐겁기 때문이다. 이 ‘즐거움’이 중요하고, ‘즐거움’에 따른 선택이 중요하다. 영양이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을 중요시하는 어른들은 많아도, 즐겁게 먹는 것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적은 것 같다. 어린이들에게 먹거리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는 믿음을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함께 즐겁게 먹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볼 수는 없을까. 어쩌면 아이들은 ‘채소’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먹도록 강요되는 구조를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여름 어느 날, 밭에서 딴 싱싱한 고추를 얻어 와 아삭아삭 씹어 먹으며 행복해 했다. 밥 한 그릇에 고추 스무 개를 먹어 치웠던 것 같다. 그런 날 보던 일곱 살 난 아이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다가 왔다. 이게 그렇게 맛있나 하는 표정으로 고추를 들어 쌈장에 푹 찍어서 과감히 입에 넣고 아삭아삭 씹으며, “맛있다”고 놀라워했다. 아이가 고추를 먹으며 행복해 하던 그 날의 신비한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새로운 먹거리를 먹는 것은 어린이들에게 하나의 신비한 모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모험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기획해 보면 어떨까 한다.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이다.
덧붙임
이선주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