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8일부터 10일까지 뉴욕에서 ‘에이즈에 관한 유엔고위급회의(UN general assembly high level meeting on HIV/AIDS)가 열렸다. 이 회의의 목적은 지난 10년간의 에이즈대응에 대한 포괄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향후 10년을 대비하기 위해 에이즈에 대한 새로운 선언문을 채택하기 위함이다.
선언문 채택 과정에서 에이즈 감염인 그룹과 미국, 유럽, 일본 정부가 정면 대립하였다. 그 쟁점은 의약품접근성이다. 2011년 4월말에 공개된 선언 초안 21조, 52조를 둘러싸고 FTA(에프티에이, 자유무역협정), 지적재산권 집행조치, 의약품접근권에 대한 입장이 대립한 것이다. 인도-EU FTA,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위조방지무역협정(ACTA)과 유럽의 에이즈 복제약 압류조치 등을 통해 미국과 유럽이 트립스협정보다 더 강력한 지적재산권보호를 강요하고 있는 상황 때문이다. 게다가 초국적제약회사의 비협조로 의약품특허풀(MPP)이 정체되고, 선진국들이 기금제공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어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를 위한 글로벌펀드로 모인 기금이 2009년부터 줄고 있다.
여전히 치료받지 못하는 감염인 많아
유엔에이즈(UNAIDS)가 유엔고위급회의를 앞두고 6월 3일에 발표한 보고서 ‘에이즈 30년: 기로에 선 국가들(AIDS at 30: Nations at the crossroads)’에 따르면 2001년에 비해 2010년 말 현재 저/중간소득 국가에서 에이즈 치료를 받고 있는 감염인은 약 660만 명으로 획기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치료가 필요한 900만 명의 에이즈 감염인이 여전히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에이즈 치료제에 대한 접근성이 확대된 것은 값싼 복제약 덕분이다. 유엔에이즈는 2015년까지 1500만 명의 에이즈 감염인이 치료를 받으려면 최소 220억 달러의 국제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추산한다.
120개국이 넘는 개발도상국에 공급되는 에이즈 치료제의 90%가 인도산 복제약이고, 전 세계 에이즈 치료제의 50%를 인도에서 공급하고 있다. 인도는 에이즈 치료제 외에도 항암제, 혈압약, 당뇨약 등 전 세계 복제약 시장의 20%를 공급하고 있어 ‘세계의 약국’으로 불린다. 북미, 유럽, 일본, 한국 등 소위 선진국과 몇몇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인도산 에이즈 치료제에 의존하고 있다. 이중 상당수의 개발도상국들은 글로벌펀드, 국제의약품구매기구와 같은 국제적 기금을 통해 구입한 값싼 인도산 에이즈 치료제를 공급받고 있다. 이 조차도 1차 에이즈 치료제에 집중되어있다. 1차 치료에 내성이 생기거나 부작용이 발생하면 2차, 3차 치료제로 바꾸어야 하지만 이 약들은 매우 비싸다. 따라서 2015년까지 1500만 명의 에이즈 감염인에게 에이즈 치료를 받게 하려면 국제적인 지원이 확대되고 값싼 2, 3차 복제약이 생산, 공급되어야 한다.
의약품 접근권 가로막는 협정들
그런데 유럽연합은 FTA를 통해 인도에 의약품 자료독점권을 강요하고 있다. 자료독점권이 부여되면 특허가 없는 혹은 특허가 만료된 의약품일지라도 판매독점권이 생기게 되어 복제약 생산과 수출을 못하게 되고, 심지어 강제실시와 같은 특허권의 공공적 사용도 못하게 된다. 미-요르단 FTA 체결 후, 2001년 이후부터 2006년 중반까지 21개의 초국적 제약사가 요르단에 등재한 특허가 없는 신약의 79%가 오로지 자료독점권 때문에 복제약이 출시되지 못했다. 이 신약들의 가격은 너무 비싸서 거의 사용되지 못하고 이름만 있는 약이 되었다. 120개국이 넘는 국가의 에이즈 감염인에게 인도-EU FTA는 살인을 의미한다. 또한 미국은 미국 주도의 아시아태평양지역 경제통합을 위해 싱가포르, 베트남,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호주, 칠레, 페루 등과 올해 말까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타결할 목표를 갖고 있다. 미국은 한미 FTA협정을 기본으로 TPP 협상을 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위조방지무역협정(ACTA)은 복제약의 수입과 수출을 막을 위험을 갖고 있다. 지적재산권 집행조치는 초국적기업들이 지적재산권 침해를 빌미로 사법절차의 기본 원칙을 훼손하면서까지 소송을 손쉽게 제기하도록 하고, 과다한 배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위조 상품 유통 문제의 해결을 명분으로 지적재산권 집행조치를 강화한 복수 국가간 무역협정이 바로 ACTA이다. ACTA는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들이 지적재산권 강화를 통해 얻는 흑자폭을 더 늘리기 위한 국제규범을 만들겠다는 것이지, 위조 상품의 유통을 막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ACTA의 전초전에 해당하는 사건이 2008~2009년에 발생했다. 유럽을 거쳐 브라질로 가는 인도산 복제약을 유럽에서 위조품으로 취급하며 압류하였다. 이 의약품은 수출국(인도)과 수입국(브라질)에서 지적재산권 침해 문제가 없는 의약품인데, 네덜란드에서 환적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 세관에 의해 압류 당했다. 인도와 브라질은 2010년 5월 12일 네덜란드와 유럽연합을 상대로 WTO(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한 상태이다.
미국, 유럽, 일본 정부의 횡포
세계 각국의 에이즈 감염인 단체와 사회운동단체는 6월 3일에 유엔고위급회의를 앞두고 모든 자유무역협정과 트립스플러스(TRIPs-plus)조치들에 모라토리움을 촉구했다. 또한 의약품접근권을 훼손하는 원인으로써 지적재산권과 FTA의 폐해를 부정하는 미국, 유럽, 일본 정부의 입장을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자유무역협정은 복제약의 생산과 공급을 막고 약값폭등을 초래하며, 지적재산권조치와 ACTA(위조방지무역협정)는 복제약의 수입, 수출을 막아 전 세계 에이즈감염인의 의약품접근권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6월 10일 유엔이 채택한 선언문(Political Declaration on HIV/AIDS: Intensifying our Efforts to Eliminate HIV/AIDS)에는 미국, 유럽, 일본 정보의 요구가 반영되었다.
선언문 초안 21조는 “의약품 특허의 강력한 집행이 새로운 에이즈 복제약의 경쟁을 제한하고, 더 나아가 트립스 협정보다 강력한 지적 재산권 보호를 강요하는 무역 장벽 및 양자간․지역 무역협정이 값싼 의약품에 대한 접근성을 심각히 제한하는 것을 주목하라”는 문구를 담고 있었다. 미국, 유럽, 일본정부는 이 문구의 삭제를 요구했다. 결국 이 문구는 선언문 35조의 ‘지적재산권의 보호와 집행 조치는 트립스협정에 부합해야 한다’는 문구로 대체되었다. 또 일본정부는 초안 51조 전체의 삭제를 요구했다. 초안 51조는 (강제실시와 같은) “트립스협정의 유연성을 전적으로 활용하도록 국내법을 개정하고, 트립스협정보다 더 강력한 지적재산권보호를 강요하는 무역협정과 무역장벽들을 해소하고, 의약품특허풀(patent pool)과 같은 새로운 메카니즘을 촉진”하도록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미국, 유럽, 일본 정부는 오히려 초안 20조에 “신약 개발에 있어 지적재산권의 중요성”을 삽입하도록 요구했다. 이는 선언문 71조에 반영되어 ‘더 효과적인 에이즈대응을 위해 지적재산권체제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한편 무역협정에서 지적재산권조항이 트립스유연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하라’, ‘의약품의 합법적인 교역에 대해 장벽을 없애는 방식으로 각국은 지적재산권 집행조치를 적용하라’고 수정되었다.
한미 FTA 비준 저지해야 한다
유엔은 2015년까지 1500만 명의 에이즈 감염인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약속을 선언문에 담았지만 세계 각국의 에이즈 감염인이 절감하는 FTA의 폐해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음으로써 그 약속의 실현은 고사하고 현 상태도 유지하기 힘들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선언문은 선언 초안보다 후퇴했다. 의약품접근권을 훼손하는 원인으로써 지적재산권과 FTA의 폐해를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고, 그 해결책 또한 지켜지지도 않고 있는 과거의 선언을 반복함으로써 초국적제약자본과 FTA 및 ACTA를 추진하는 정부에게 물어야 할 책임을 회피했다. 트립스플러스 조치의 종합판이자 미국의 허락 없이는 독자적인 의약품정책 및 제도의 수립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한미 FTA, 협정문 번역상의 오류마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국회비준을 서두르고 있다. 인권을 말해왔던 유엔조차 자본 앞에서 의약품접근권을 보장하는데 주춤하고 있는 상황은 한미 FTA 비준을 저지해야할 우리의 몫이 더 커졌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한다.
덧붙임
권미란 님은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