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하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공간
국어사전은 방을 ‘사람이 살거나 일을 하기 위하여 벽 따위로 막아 만든 칸’으로 정의하고 있다. 슬프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 없이 살고 있다. 잊지 못한 몇 군데 회사는 이런 경우도 있었는데, 학습서로 유명한 업계 1위의 회사는 사내 직원들의 모든 컴퓨터와 키보드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다. 메신저를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 직원들 머리 바로 위에 CCTV가 한 대씩 달려 있었고 그 화면은 사장의 넓은 방 벽 한 면을 모두 차지하는 평면TV에서 한 눈에 다 볼 수 있었다.
또 밖에서 보기에는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대표가 열과 성을 다 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건물 내에 합판으로 벽을 만들어 세 평 조금 안 되는 공간 안에 열 명의 직원이 직경 80센티미터의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하도록 만든 회사도 있었다. 창문도 환풍기도 없었다. 직원들이 환기와 소음 문제 등으로 이의를 제기하자 ‘퀴리부인은 뒤에서 폭탄이 터져도 연구를 계속 했다’는 얘기를 남겨 직원들을 경악하게 했다. 그 회사는 자주 좋은 기업의 예로 신문에 오르내리고 대표의 방송출연으로 이름이 나 있는 곳이었다. 대표의 방은 쓸데없이 넓었고 한쪽 벽이 모두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파티션의 쓸모없음과 악마성(?)에 대해 강변을 토하는 사장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치 모든 사람이 파티션 뒤에만 들어가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게 되는 것처럼. 그러나 사전상의 정의처럼 우리만의 공간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일을 하고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개인의 공간을 철저히 무시하는 기업 문화
우리의 기업 문화는 유난히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것을 싫어한다. 강압적인 회식자리나 술 문화 역시 개인의 공간과 시간을 철저히 무시하기 때문에 생긴다.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직원들을 감시자의 눈 밑에 두고, 누가 얼마나 오래 화장실을 가지 않고 일을 더 많이 하는지 지켜보는 식이다.
어릴 때는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하는 사람이 좋은 본이 되곤 하는데, 정작 성인이 되어 정말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만 하는 나이가 되자 사회는 우리를 광장으로 끌어내 뭐든지 감시하고 통제한다.
물론 노동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업무 환경이 있을 수 있다.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우리는 죽기 직전까지 어떤 형태로든 노동하며 살아간다. 그런데도 즐겁게 일 할 권리 정도가 우리에게 없단 말인가. 파티션의 문제가 아니라 고용자와 피고용자가 생각하는 ‘업무효율’의 다른 견해에 대한 이야기이다.
최근 몇몇 기업주들의 행태가 신문 기사에 오르내리고 있다. 유치한 사건이 대부분이었고 높은 연봉에 직원들에 대한 복지가 좋을 것이라고 기대되는 대기업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기업에 입사하는 동시에 개인이 가진 공간의 인권은 말살되고 기업주로 대표되는 회사에 모든 것을 상납하는 것을 가장 충성도 높은 직원의 태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개인의 공간을 무시하니 소통하기 힘들고, 그러니 일방적인 통보와 지위를 이용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서점에 나가보면 잘 나가는 자기계발서들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오래 살아남고 싶은가? 그렇다면 죽은 척하고 연휴도 개인 시간도 인권도 모두 반납하라!”
공간과 인권
우리는 누구나, 집에 돌아와 짜증나게 만드는 상사의 엉덩이를 상상 속에서 걷어차면서 무릎이 나온 후줄근한 옷을 입은 채 널브러져 맥주 캔을 홀짝 댈 시간이 필요하다. 일을 할 때에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두뇌활동을 활발하게 해 주는 현장 분위기나 몸을 움직일 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게 해 주는 업무 환경이 분명 있다.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 지켜질 때가 바로 그런 때이다.
공간은 곧 인권과 연결된다. 물리적인 공간도 정신적인 공간도 모두 그렇다. 어쩌면 우리가 연봉수준이나 상여금의 비율보다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과 배려, 개인의 인권을 어떤 식으로 대우하느냐가 아닐까.
덧붙임
박혜경 님은 사회적기업에서 독서장애인을 위한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