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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의 인권이야기] 저항과 연대! 죽음을 막는 가장 큰 생명의 길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열일곱 번째 죽음을 보내며

10월 12일 17번째 죽음을 보내고 온 마음은 너무도 처참했다. 서른여섯 살 젊은 청년 노동자의 한이 서린 쌍용차 정문 앞에서 너무도 어렵고 힘들었을 고 김철강 동지를 보내는 노제를 지냈다. 쌍용차 조합원을 비롯해 그곳에 모인 이들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나 역시 멍하니 서 있었다. 추도사를 하러 나온 쌍용차 김정우 지부장은 말을 잇지 못하고 “얼마나 더 죽어야 되냐. 얼마나 더 죽어야 우리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냐. 살려내라, 살려내 개새끼들아” 쉰 목소리로 외치며 울부짖었다.


죽음이 아무 일도 아닌 일상이 되는 건 아닐까

욕으로 추도사를 하면서 우는 김정우 지부장의 울부짖음에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고 나도 정신없이 울었다. 사람은 얼마나 많고 크고 깊고 높은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같은 시간 성질을 내며 들어가는 냉소적인 산자들을 보며 또 생각했다. 사람은 얼마나 비정하고 비참한 존재일까? 눈물 속에 한탄과 울분이 가득 차 흘렀다.

가대위의 추도사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전염병으로 한 곳에서 몇 명만 죽어도 난리가 나는데 쌍용차에서만 최근 2년 동안 벌써 17명이나 목숨을 잃었는데 세상은 왜 이렇게 조용한가요? … 이러다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아무 일도 아닌 일상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무섭고도 지독한 상상이 자꾸 되풀이 돼요.”

저들은 처음엔 명예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쫓아냈다. 재개발에 피가 묻자 뉴타운이라는 말로 돌려 치듯 저들은 나중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자진 퇴직하게 했다. 명예퇴직 희망퇴직은 정리해고의 수순이다. 우리 노동자들에게 자살인가 타살인가를 가르는 저승사자의 이름이다. 자살자들에겐 미끼가 눈앞에 던져졌다. 위로금이라는 미끼다. 마치 오징어잡이 배가 엄청 환한 불빛으로 오징어를 유혹하듯. 별것 아닌 것을 미끼로 한 사람의 평생 업을, 그 사람이 살아온 가장 큰 이력을 도려낸다.

[그림: 윤필]

▲ [그림: 윤필]


되돌아온 정리해고의 악몽

‘함께 살자’ 이 말을 우리는 1998년 IMF 사태 때 이미 사용했다. 회사가 20% 어려워 20%를 잘라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20%를 절약해서 함께 살자고 했다. 그러자 고용보험을 도입하면서 저들은 죽어도 괜찮다고 했다.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미끼를 내밀면서. 그때도 우리는 목을 자르고 빨간 약 발라주면 뭐하나! 목을 자르지 말라 했다. 하지만 저들의 목표는 목을 자른 곳을 비정규직이라는 무섭고 비참한 일자리로 채우는 것이었고 어느덧 그 숫자가 절반을 훌쩍 넘었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이라는 비참에 빠져 정신없어 잊어버렸던 정리해고의 패륜을 다시 현실의 장에 밀어 올렸다. 77일의 옥쇄파업이라는,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의 눈물과 피를 바치면서 빈곤과 차별의 뿌리, 비정규직 비참의 시작 정리해고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우리 모두 죄인이며 살인의 방조자라는 엄중한 진실을 펼쳐 냈다.

‘해고는 살인이다’ ‘정리해고는 묻지 마 살인이다’ ‘정리해고는 연쇄살인이다’
구호가 현실이 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우리는 지금 너무나 절실히 확인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진 자리에 피는 것은 우울과 고립과 단절을 통해 죽음으로 가는 병이요, 정과 의리와 사람됨이 사라진 이기와 탐욕으로 황폐해진 인간은 인간의 지옥이 되는 악의 병이었다. 처음엔 희망을 가지고 퇴직을 했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지쳤다. 그리고 함께 지옥을 견디다 정신을 놓은 가족들이 있고, 실낱같은 희망으로 무급휴직을 감수했던 노동자가 죽어갔다. 아직 77일을 견디고 투쟁한 이들, 지금 투쟁하는 이들은 분노로 생명을 지탱하고 있지만 그들의 눈에도 죽음이 아른거린다. 그 사이 죽어간 이들이 벌써 17명.


자포자기를 막는 길, 생명을 구하는 길

어디서 듣기에 공자님은 사람이 범하는 가장 중한 범죄는 도둑질도 사람 죽이는 것도 아닌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것이라 했다. 우리가 뭘 포기한다고 할 때 그것은 뭐를 모독하고 버리는 것이고, 자포자기는 자기를 모독하고 자기를 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며칠 전 어느 교육에서 ‘자포는 영혼과 꿈이 포기되는 것이고, 자기는 몸마저 버리는 것’이라 설명했다. 그런데 사람은 처음부터 관계의 존재다. 그래서 자포자기 전에 반드시 타포타기(他暴他棄)가 있다. 17번째의 죽음이 된 김철강 조합원의 핸드폰에는 본인 사진 두 장과 친구 전화번호 하나를 남기고 모든 것이 지워져 있다고 했다. 그가 6개월 동안 세상을 하나하나 단절하고 자기를 한발 한발 고립과 박탈과 죽음의 길로 몰아가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포자기로 가는 이를 방조하고 만 것이다. 이 죽음의 굿판을 여는 것은 여전히 노동을 돈벌이로 치부하고 사람의 삶을 일회용 소모품으로 던져버리는 반인간적인 신자유주의 정글논리, 아니 사람을 수단으로 돈을 목적으로 바꿔치기한 자본주의다.

나는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지 못하는 이들,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이들은 적어도 사람다움을 포기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돈 중심의 돌아 버린 세상에서는 사람을 수단으로 삼고 승자만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정글법칙을 생의 지혜요 힘이라 믿는 비극이다. 그중 가장 치명적이고도 절대 다수를 빈곤과 차별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바로 정리해고 비정규직이다. 사람이 얼마나 사람에게 사악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것도 한 치의 양심의 가책이나 염치도 없이 당당하게 아주 당연하게 자행되는 악이다.

나는 느낀다. 정리해고라는 죽음의 늪에서 살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면서 정말로 사람이 죽는 것은 해고도 생활고도 구직난도 아니고 외로움도 고립감도 박탈감도 아니다. 77일 파업을 했는데 그 피 묻은 약속마저 지키지 않는, 삶과 미래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과 희망,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이중 삼중 파괴되는 그 절망에서 비롯된다. 먼저 인간의 존엄과 나의 일터와 노조라는 마지막 인간관계의 실낱을 포기당한 이들이 먼저 죽음이라는 벼랑 끝에 선다. 항복하지 않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 지금 바로 원망과 탄식이 아니라 분노와 열정으로 투쟁하는 것, 연대를 하고 연대를 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을 막는 가장 큰 생명의 길이다.
덧붙임

김소연 님은 금속노조 기륭분회 분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