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문까지는 아니어도 반성을 처음으로 강요받았던 건 집회하다가 잡혀가 경찰 조사 받을 때였다. 나를 조사하던 경찰이 조사 말미에 나에게 물었다. “또 집회에 참여할 겁니까?” 그 경찰은 그냥 평소 하던 대로 습관적으로 물어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게 겁주기로 느껴졌다. 실제로 내 마음은 갈등했다. 진심을 말하면 괘씸죄로 더 안 좋은 결정이 날 거 같고, 그렇다고 집회에 다시는 참가 안 하겠다고 거짓말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 난 그냥 묵비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갈등하는 내 마음을 들킨 거 같아 기분은 무척 더러웠다.
학교도 졸업했겠다, 집회 나가도 잡히지만 않으면 반성 따위 강요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순진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사에는 시말서, 혹은 경위서라 부르는 반성문이 또 있었던 거다.
나는 경위서를 지금까지 딱 한 번 썼다.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편집자로서 낸 첫 책에서 표지에 글자와 그림이 겹쳐서 나와서 표지를 모조리 새로 찍어야 했다. 내가 잘못해서 회사에 손해를 끼친 일이라서 회사에선 당연히 일이 어찌 되었는지 경위를 파악했어야 했고, 경위서 제출 요구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일의 경위를 파악하는 경위서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학교에서 쓰게 하는 반성문, 경찰서에서 쓰게 하는 반성문과 마찬가지로 반성을 강요하는 경위서도 있었다.
어느 직원이 대표이사의 업무지시에 대해 자기 의견을 피력하면서 업무지시를 그대로 이행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대표이사는 그 직원의 글이 자기에게 심한 언어폭력이 되었다며 징계위원회를 소집했다. 노동조합에서 징계를 막았지만, 회사는 노동조합의 동의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경위서 작성을 해당 직원에게 요구했다.
그 직원은 말 그대로 그동안 경위를 정리한 경위서를 써서 냈다. 헌데 상무이사가 경위서를 결재할 수 없다며 다시 쓰라고 했다. 반성하는 기색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표이사와 다르게 생각한 것이 왜 잘못인지 알 수 없지만, 백번 양보해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반성을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잘못하지 않은 것을 잘못했다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다만 이 상황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며 경위서를 고쳐 냈지만, 여전히 회사는 다시 써 오라고 했다. 세 번을 썼는데도 반성이 부족하다며, 아주 콕 집어서 이 부분은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써오라는 거였다.
언론노조에 연락해서 도움을 청하니 대법원판례들을 보내줬다. ‘사건의 경위를 담은 경위서라면 몰라도, 반성을 강요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에 위배되며 반성하지 않는 것이 징계의 사유가 될 수 없다. 다만 스스로 반성하면 정상참작 할 수는 있다.’ 판례들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대법원판례를 회사에 보여주고 나서야 그 직원은 경위서를 다시 안 쓸 수 있었다.
근데 이런 이야기는 우리 회사에만 있는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만났던 어느 노동자는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경위서를 40번이 넘게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잘못을 많이 했냐니까, 노조를 만든 게 회사한테는 가장 큰 잘못이지 않냐고 씩 웃으며 대답했다.
노동자들에게 경위서를 쓰게 하는 사장들이나, 피고인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재판관, 학생들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하는 선생님들이 바라는 게 진짜로 반성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복종을 바라는 것이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개기지 않고 말 잘 듣겠습니다.” 이런 태도를 바라는 거다. 그 태도에 굳이 진심이 담길 필요는 없다. 어차피 충성을 맹세하라는 게 아니라 복종을 증명하라는 것이니까.
우리 회사 직원은 결국 복종하지 않았다. 대표이사가 바라는 그 한마디를 쓰지 않았다. 덕분에 회사한테 온갖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진심 어린 반성이 담기지 않았단 이유로 여러 번 경위서를 쓰는 동료를 옆에서 보면서 나는 내 양심이 짓밟히고 내 존엄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내 병역거부한 양심이 같이 모욕당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랬으니 당사자는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덧붙임
용석 님은 출판노동자이며 전쟁없는세상 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