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포항, 부산, 대구, 구미, 원주, 청주 등 숨 쉴 틈 없는 일정으로 투쟁하는 전국의 노동자들을 만났다. 거리에 천막을 치고,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은 20대의 젊은 여성들부터 60대가 다 되어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나이 든 노동자들까지 다양했다. 최저임금조차 체불하고 노동조합을 깨부수려는 사측에 대항해 신나게 싸우는 대구시지노인병원 아지매 노동자들. 노동자들의 단물만 쪽 빨아먹고 하루아침에 미국자본이 본국으로 철수해 거리로 내몰린 문막공단의 ‘깁스’노동자들. 자기 돈으로 산 차도 회사에 저당 잡혀 일하지만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제천의 화물노동자들. 회사 앞 농성천막이 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질 동안의 시간을 버텨온 발레오 노동자들. 해고됐지만 발랄하게 싸우는 구미 KEC 노동조합의 언니들. 156억의 손해배상에 치를 떨며 힘겹게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부산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그리고 일주일간을 함께 했던 쌍용차와 현대차 해고 노동자들...
하루는 포항의 한 노동조합을 만나 간담회를 하고 공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쌍용차, 현대차 해고자들과 나란히 공장에 들어서서 식판에 밥을 뜨는데 문득 이들에게도 이런 일상들이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은 해고자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헤매지만, 이들도 아침에 출근해 일하고 동료들과 수다 떨며 밥을 먹는 일상이 있었겠지.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런 일상을 빼앗기고 심지어는 죽음으로 향하는 동료들을 마주하게 되는 삶을 그들이라고 상상이나 해 봤겠는가.
매번 지역을 떠날 때마다 노동으로 단련된 손을 맞잡는다. 힘내시라 인사하며 바라본 사람들의 손은 가지각색이다. 물을 많이 만져 거칠어진 엄마들의 손도 있고 깨끗하게 매니큐어를 발랐지만 힘이 느껴지는 언니들의 손도 있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가 댕강 잘려 있는 손도 있다. 피땀을 내서 일을 하고 청춘을 다해서 회사를 키우고 손가락 한 마디까지도 기꺼이 바쳐가며 일했던 시간에 비해 그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것은 민망할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꽃무늬 미니스커트도 곱슬머리 아주머니도 흙 묻은 작업화를 신은 아저씨도 쌩하니 지나가기 바쁘다. 아마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50평생을 살면서 이제야 세상을 알게 됐다는 아지매의 수줍은 고백은 당신도 당신이 오늘 외면한 그 거리의 사람들처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해군기지로 마을이 송두리째 갈라진 강정마을이나 용산참사로 가족을 잃고 동료를 감옥에 보낸 철거민들이나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한가지이다. 이전에 살던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요구이다. 강정마을 주민들은 원래대로 농사짓고 바다에 나가서 일하고 이웃들과 웃으며 인사하는 삶을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다. 노동자들은 억울하게 쫓겨난 공장으로 다시 되돌아가서 차별받지 않고 일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 철거민들은 밝혀지지 않은 죽음의 진실규명과 삶의 터전을 함부로 빼앗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
자본과 권력이 너무나 손쉽게 빼앗는 그 땅덩어리가, 그 집이, 그 상가가, 그 일자리가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살며 알뜰히 가꿔온 소중한 것들이다. 그 바위, 그 바다, 그 강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통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 소중한 것들을 파괴하는 일은 너무나 쉽지만 파괴된 것들을 다시 제자리로 되돌리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노동자가, 구럼비가, 쫓겨나는 사람이 하늘”이라는 SKY연대의 구호는 너 혼자만 하늘로 사는 사회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늘로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자고 호소하고 있다. 오늘 당신이 지나치는 무수한 거리의 사람들은 곧 당신의 미래일 수 있으니 우리 함께 손 맞잡고 서로가 서로에게 하늘이 되어주자고 말하고 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는 바로 당신에게 그리고 나에게 달려 있다. 끝까지 관찰하고 방관할 수도 있고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갈 수도 있다. 어떤 입장을 취하던 욕하고 손가락질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이건희의 사돈의 팔촌쯤이라면 몰라도 결국은 당신도 노동자이고 세입자이고 국가권력 앞에 나약한 한 인간이니까.
덧붙임
딸기 님은 평화바람 활동가입니다. 현재는 제주 강정마을에서 평화는 그냥 오지 않는다는 말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