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주>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7년, 민주화운동의 열정 속에서도 우리는 형제복지원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2013년 한국사회에 여전히 시설은 다양하게 존재하고 여러 권력과 폭력의 구조들이 그곳을 재생성하기도, 은폐하기도 한다. 8살의 나이였던 1984년 10월 16일 형제복지원에 입소해 1987년 또 다른 시설로 옮겨진, 「살아남은 아이」한종선이 다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이제라도 시설은 어떻게 생겨났고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개인을 부수어 갔는지 물어야 하는 때이다. 살아남은 자와 다른 사회구성원이 소리를 들으려 하고 여러 질문들로 곱씹을 때, 답이 아닌 ‘길’이 보일 거라 믿는다. 그 소리가 우리 사회에, 우리의 가슴에 퍼지도록 인권오름과 탈(脫)시설운동을 하는 ‘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이 함께 형제복지원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 현재적 쟁점을 짚어보고자 기획연재한다.
총체적 인권유린 사건으로서 형제복지원사건
국가기록원은 형제복지원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산형제복지원사건은 부산시 진구 당감동의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인권유린 사건이다. 형제복지원은 전국 최대의 부랑아 수용시설로, 이곳에서 1987년 3월 22일 원생 1명이 구타로 숨지고 35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형제복지원의 실체가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사 결과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선도를 명목으로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을 끌고 가서 불법 감금시키고 강제노역을 시켰으며, 저항하면 굶기고 구타하거나 심지어 살해하여 암매장까지 하였다. 이렇게 하여 12년 동안 무려 531명이 사망하였고, 일부 시신은 3백∼5백만 원에 의과대학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간 것으로 밝혀졌다. 원장 박인근은 매년 20억 원의 국고 지원을 받는 한편, 원생들을 무상으로 노역시키고 부실한 식사를 제공하여 막대한 금액을 착복하였다. 또한 자신의 땅에 운전교습소를 만들기 위해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하고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시켰다. 이 사건으로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을 비롯한 직원 5명이 구속되었으며, 형제복지원 원장은 1989년 9월 14일에 2년 6월형이 확정되었다.”
이 정도면 형제복지원사건을 사회적 주변인으로 상정된 부랑인에 대한 전면적이고 총체적이며 반문명적인 인권유린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형제복지원에 강제구금되었던 부랑인들은 누구인가
대법원의 형제복지원사건 판결에서 볼 수 있듯이, 부랑인 단속과 강제구금의 근거가 된 것은 1975년 제정된 내무부 훈령 제410호(「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조치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지침」)이다. 이 훈령에 의할 경우 “일정한 정주가 없이 관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터미널 등 많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를 행하는 모든 부랑인”(규칙 제1장 제2절)이다. 심지어 이 훈령은 “노변행상, 빈 지게꾼, 성인껌팔이 등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자들”을 준부랑인으로 규정하여 부랑인 대책에 준하여 단속 조치하였다(규칙 제1장 제3절 6호). 거리에서 외관상 아름답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단속과 강제구금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노동력 창출 위해 부랑인을 처벌했던 초기자본주의
사실 부랑인 문제는 자본주의 모순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자본주의 발달과정에서 노동력의 확보는 농민을 토지로부터 추방하고 무일푼의 프롤레타리아를 만듦으로써 이뤄진다. 그래서 영국에서 본격적인 부랑인법은 1349년 노동자법령(the Statute of Labourers)으로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1348년 흑사병은 노동력을 급감시키고 노동임금을 현저히 상승시켰다. 이에 따라 영주는 상승된 임금을 지불하기 위해 농노에게 더 무거운 부담을 지우게 되고, 농노는 더 나은 생활조건을 좇아 도망간다. 이러한 배경에서 1349년 노동자법령은 영주에게 자기의 농노와 소작인에게 대하여 우선권을 보장하여 영구 상호간의 농노쟁탈전을 제한하고, 농노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걸식과 유랑을 금지시키고 걸인에게 자선을 하는 것도 처벌하였다. 15세기의 폭력적 토지수탈인 인클로저운동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은 도시빈민을 형성하고 대규모 부랑자가 되었다. 첫 부랑인법인 헨리 8세 시대의 1530년 법률에 의하면, 노동력이 있는 자가 구걸하거나 부랑자이면 초범인 경우 태형과 감금형으로, 2범인 경우 태형에 처하고 귀를 절반 자르며, 3범인 경우 중죄인으로 또는 공동체의 적으로 사형된다. 이후 부랑인법은 처벌규정을 더 강화하여 가슴이나 이마에 낙인찍기, 부랑인신고자의 종신노예화․부랑인 자녀의 도제화․노예화, 재범으로 18세 이상으로 2년간 이들을 사용할 사람이 없는 경우에 있어 사형, 3범인 경우는 반역죄로 사형시킬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도 17세기 중엽 파리에 ‘부랑자 왕국’이 만들어지자 루이 16세는 칙령(1777년 7월 13일)으로 16세부터 60세에 이르는 건강한 사람이 생활수단과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인 경우 갤리선을 젓는 형벌에 처했다. 미국의 부랑인법도 영국의 부랑인법을 이어갔다. 이 시대의 부랑죄의 법률적 특징은 부랑자는 범죄자가 된다는 점에서, 일정한 부류의 인간에 속하면 범죄의 위험성이 있다는 ‘신분범죄’의 특성이 있다. 또한 임금노동의 제도에 필요한 규율에 익히도록 징벌을 가한 특징이 있다.
한국 부랑인 정책 변화
한국의 경우도 해방이후 ‘거지’라는 개념의 부랑자들이 한국전쟁과 함께 상이군경을 비롯한 ‘양아치로 불리던 무리들이 1970년대에 부랑인 개념으로 변해왔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의 산업화과정에서 노동집약적 경공업분야는 수출전략을 펼쳤고, 농민의 이농을 부추겨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농촌의 빈농들이 대규모로 도시로 이주하였고, 이 중 아무리 일을 하려고 간청해도 일자리를 잡지 못한 유휴노동력이 부랑인계층을 형성하였다. 또한 이들은 도시빈민으로 전락하여 도시문제로 지목되고, 무허가판자촌의 철거 등 대규모 도시정비사업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주거의 불안정이 취업의 불안정과 함께 들이닥쳐 대규모의 부랑인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한국의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정당하게 배려 받지 못하고 배제된 가장 비참한 레미제라블이 부랑인 또는 준부랑인들로 규정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부랑인에 대한 어떠한 법제적 정비 없이 보안처분으로 부랑인을 강제수용하고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1961년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 취급하면서 단속과 강제수용, 정신교육과 징벌적 강제노동을 부과했다. 유신독재시대인 1975년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조치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지침’(1975.12.15. 내무부훈령 제410호)의 제정은, 법령이 아니라 훈령이지만 국가가 경찰법 차원에서 부랑인문제에 적극 개입하는 최초의 공식문서이다. 물론 법률이 아니라 행정규칙이므로 강제수용의 법적 근거가 될 수 없다. 전두환 정권은 ‘부랑인 복지시설운영개선 종합대책’을 마련하고, 내무부 훈령 제410호를 폐지하고, 관할부서도 보건사회부로 변경하였다. 새로 제정된 ‘부랑인 선도시설 운영규정’(보건사회부 훈령 523호.1987.4.6.)에서도 “부랑인을 일정한 주거가 없거나 무의탁한 사람 또는 연고자가 있어도 가정보호를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거리를 방황하면서도 시민들에게 위해와 혐오감을 주는 등 건전한 사회질서의 유지를 곤란하게 할 뿐 만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결함으로 정상적인 사고와 활동능력이 결여된 정신착란자, 알코올 중독자, 걸인, 앵벌이, 18세 미만의 불구 폐지자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내무부도 ‘부랑인 등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의 훈령을 발표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경범죄처벌법, 경찰관직무집행법 등에 의거하여 치안차원에서 처벌, 조치하도록 되어있다.
전두환 정권의 통치전략이 빚어낸 형제복지원 사건
형제복지원사건은 이와 같이 한국의 산업화·도시화 과정에서 드러난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을 배경으로 하여, 독일의 히틀러 시대와 같은 한국 현대사의 전체주의적 정치권력의 특수성이 만들어낸 사건이다. 히틀러시대에도 부랑인을 반사회적 행위자로 규정하여 예방적 강제구금을 벌이는 노동기피왕국 작전(Aktion "Arbeitsscheu Reich")이 있었다. 즉, 당시 파행적인 정치권력의 반민주성·반민중성에서 가장 큰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중세의 마녀사냥은 사회불안을 이용하여 체제의 모순을 특히 가난한 미망인이나 독거노인, 장애인 등 일반적으로 빈곤층에게 돌리고 공동체에서 그들의 존재를 배제함으로써 체제 안정을 도모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중세의 마녀사냥과 같이 정치적 정당성이 취약한 통치권력은 국민적 지지를 획득하는 통치수단으로서, 적과 친구를 구별하거나 생성하고, 그 적을 박멸함으로써 권력의 안정성과 함께 정당성을 획득하는 전략을 필사적으로 구사한다. 적의 실체가 없으니 내키는 대로 조작하고 가공할 수 있다. 불법적 군사정부에서 부랑인은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교란하는 게으르고 나태한 반사회적인 ‘적’으로 항상 등장한다.
불법적 파시스트 정권이었던 전두환 정권도, 형님 독재자 박정희가 그러했던 것과 같이 흠결 있는 정치적 정당성에서 벗어나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복지국가의 건설이라는 정치적 슬로건을 내세우고 정의사회구현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정화와 사회악 일소를 내세웠다. 그 이름으로 삼청교육, 사회정화위원회의 조직과 사회정화 국민운동, 학원정화사업인 녹화사업을 실시하였다. 또한 2차례의 대통령훈령에서 볼 수 있듯이 무질서를 낳는 원인제공자로서 부랑인을 지목하고 이들에 대한 강제구금과 사회격리의 통치전략을 수립·시행하였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전후로 벌인 ‘거리정화프로그램’을 통해 부랑인에 대한 단속과 강제구금은 강화되었다.
이와 같은 부랑인에 대한 일체 단속과 강제구금의 결과 수용능력이 한계에 이르자 수용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게 된다. 이러한 전두환 정권의 부랑인정책으로 부랑인은 생물학적으로는 사람인데 법적으로는 인간실격(人間失格)의 더러운 물건에 불과한 취급을 받으며 말끔히 청소되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들은 ‘권리를 가질 권리’ 조차 없는 법적 무지위 상태 그 자체였다. 이 기간에 수용된 사람들이 거의 퇴소를 하지 못하고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설에 수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지금도 이들은 형기 없는 감옥에 갇혀 있다.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
전두환이 형제복지원의 박원장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해 내린 말이다. 이 평가 한 마디에 형제복지원 사건의 뒷배를 책임진 권력이 드러난다. 나아가 1987년 형제복지원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지만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에 몰린 정권은 권력유지를 위해 청와대, 내무부, 법무부, 보안사, 안기부, 검찰, 부산시장 등의 위법한 정치적 압력을 가하며 조직적으로 사건을 은폐·축소했다.
형제복지원사건에 대한 국가책임
형제복지원사건은 불법적 군사정권이 정권보위를 위하여 계획적이고 조직적이며 대량적으로 자행한 ‘총체적 인권 침해’이다. 국가범죄란 국가권력에 의하여 자행된 중대한 인권유린행위를 말한다. 정부범죄, 인권범죄, 국가에 의해 조종된 범죄, 국제법상의 중대한 범죄, 중대한 인권침해행위 등이 국가범죄와 유사 내지 동일한 의미의 개념으로 사용된다. 제5공화국의 헌법에서도 법률에 의해서만 국민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었다. 형제복지원사건은 당시 경찰관직무집행법, 경범죄처벌법, 사회복지사업법, 생활보호법 등 어떠한 법률에도 근거함이 없이 오직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국가조직에 의한 ‘단속체계’에 의하여 계획적으로, 대량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자행된 불법적인 강제구금사건이다. 내무부 훈령은 행정규칙에 지나지 않으며 법률이 아니므로 부랑인의 강제구금에 대한 법적 근거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국가범죄의 주체에는 제한이 없다.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식적인 국가기구나 국가의 후원을 받는 단체뿐만 아니라 사기업이나 민간조직조차 국가범죄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국가의 지원과 감독을 받는 사회복지법인인 형제복지원의 법적 지위나, 국가와 사회복지법인의 업무위탁의 법률관계상 국가는 형제복지원에서의 인권유린에 대하여 관리·감독자로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자기책임으로 국가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또한 형제복지원사건은 정권이 은폐·축소하여 진상규명과 피해자에 대한 효과적 구제조치가 가로막혔다는 점에서 체제의 범죄이기도 하다.
국가폭력과 국가범죄는 독일의 히틀러 시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수 국민의 동의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 묵인과 방조했던 우리들 역시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에 대하여 시민으로서 책임이 있다. 더구나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규명과 국가책임이 아직도 인정되지 않은 2013년, 우리가 성찰하고 풀어야 할 일이 여전히 많다.
덧붙임
김명연 님은 상지대 법학부 부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