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라면을 먹을 때, 옆에서 방울이(고양이)는 하품을 한다.
옆에서 방울이가 하품을 할 때, 이웃집 미미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린다.
이웃집 미미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릴 때…"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친구와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거나, 보일러를 켜려고 스위치를 누르고 있거나, 43번째 회사에 자기소개서 메일을 보내고 있거나, 자동차를 운전해 집으로 가고 있거나, 회사에서 보낸 해고 문자를 읽고 있거나, 살던 곳에서 쫓겨나 주저앉아 울고 있거나, 누군가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분향소의 촛불을 켜고 있거나…
텔레비전을 보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상의 평범한 일들과 해고통보 문자를 읽는 노동자, 집과 마을에서 쫓겨난 사람과 사건은 같은 비중으로 나열할 순간은 아닌 것일까? 후자 역시 옆집에서, 이웃 마을에서, 이웃 마을의 이웃 마을에서, 이웃나라의 건너 나라에서 벌어지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처럼 너무나 일상적이라서 셀 수 없을 만큼이나 많이 벌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모르는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저 모르는 이야기일 뿐. 그리고 모르는 일은 놀랍고 어이없게도 세상에 '없는 일'이 돼버린다. 말과 글로 전달되지 않는 일, 기억되지 않는 일, 누구도 아파하지 않는 일은 '없는 일'이 된다.
굳이 '내가 알아야 해?'라고 발끈하진 않아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 무거운 마음과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모르는 일'로 넘겨진 일상은 비극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프리모 레비(2차 세계 대전 나찌수용소의 생존자)는 2차 세계대전 중의 유대인 학살을 ‘모르는 일’이었다고 말하는 독일인들에게 유죄라고 말한다. 그의 책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독일인들이 알아도 말하지 않고, 모르면서 질문하지 않고, 또 대답하지 않으며 스스로 무지해졌다며,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쓰고 있다. 모른다는 변명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속속들이 들리지 않지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심 갖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몫이다. 어쩌면 당연해서 어려운 이런 얘기를 담담하게 풀어낸 그림책이 『내가 라면을 먹을 때』이다.
내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
이 그림책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에 타인도 어떤 장소, 어떤 삶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고통 가운데 있는 지구 저편 누군가의 이야기를 구구절절하게 소개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웃마을 여자아이가 달걀을 깰 때, 이웃나라 남자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이웃나라의 이웃나라의 여자아이는 아기를 보는 다른 곳, 다른 사람의 모습이 등장할 뿐이다.
때에 따라서 구체적 사건과 인물의 사연이 마음을 울리는 글이 될 수 있지만,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자'는 주제를 담은 이야기의 경우 자칫 마음과 생각의 깊이를 더하기보다 안타까운 눈물만 남길 때가 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의 마음을 갖는 것은 더 없이 중요하지만 나와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은 때때로 '안됐다' '나는 다행이야'로 빠지곤 한다. 연민의 마음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난 다행이야'로 끝날 때 다른 처지, 다른 대우, 다른 삶... 불평등과 비인간적인 삶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존재하지만 잊혀지고 모르는 일, 그리고 마침내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고통을 알려줘야 한다는 어른들의 의지만 담은 이야기책에는 고통 받는 세계의 아동이등장하고, 후원과 편지 등의 생활 속 실천까지 제시된다. 고통에 공감하고 실천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공감도 후원도 편지도 문제는 아니다. 왜 이런 고통을 받고 있는지, 질문 없는 이야기가 문제일 것이다. 간혹 이런 이야기가 어린이에게 어렵다고, 혹은 굳이 일찍 알아야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세상 사람은 모두 이어져 있고 우린 하나'라는 것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있을까 싶다. 나를 챙기기도 힘든 지금 같은 세상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알 수도 없는 사건이 나와 이어져 있다니! 하지만, 이 어려운 얘길 우리는 끊임없이 하고 있다. 오히려 세상의 고통과 불평등의 원인을 이야기하는 게 더 쉬운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내가 라면을 먹을 때』에서 격분하며 의혹을 제기하거나 앞서서 질문을 던지지는 않는다. 짧은 문장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면 나와 너의 연결 속에 마음이 움직이고, 고통이 느껴지고, 저절로 질문이 생겨난다. 그동안 '세상의 고통'을 쏟아내며 마음을 끌어내던 이야기들에서 아쉬웠던 '공감의 이유'를 '느끼게' 한다. 자기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책장을 넘겨 보자. 마음에 바람이 불지도 모른다.
함께 사는 방법 찾기
이렇게 서로의 삶이 이어진 세상에서, 어떻게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림책 『생쥐와 산』(안토니오 그람시 글/ 마르코 로렌제티 그림/ 유지연 옮김 / 계수나무)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어린 아이의 우유를 마셔버린 생쥐는 미안한 마음에 우유를 얻어다 주기 위해 염소를 찾아간다. 하지만 먹을 풀이 없어서 우유가 나오지 않는다는 염소의 이야기를 듣고 풀을 찾아 들판에 가지만 가뭄 때문에 풀도 구할 수 없었다. 전쟁으로 부서진 수돗가에서는 물이 새고 있었고, 수돗가를 고치기 위해서는 산의 돌들이 필요했지만 욕심 많은 사람들이 나무를 모두 베어가 산은 무너질 듯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서로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얘긴 막연하지만 인정하기는 쉽다. 텔레비전의 기후변화 뉴스만 보아도 나와 지구반대쪽 그 누구의 삶이 떨어질 수 없다고 즉각 느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다음'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무엇을 문제로 보고 있는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생쥐는 노력했지만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이쯤에서 포기했을까? 아니면 고생 끝에 어디선가 우유를 얻어, 아이에게 주고 행복하게 마무리했을까? 혹은 꾀를 내어 위기를 모면했을까? 그런데 그러저러하게 해결하면, 들판의 가뭄은 어떻게 되는 거지? 전쟁으로 부서진 수돗가는? 벌거숭이 가 된 산은? 생쥐는 이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오래 걸리는 익숙하지 않은 방법
그림책 『생쥐와 산』의 돋보이는 점은 바로 해결의 방식이다. 생쥐는 그저 산에게 아이가 자라서 나무를 싶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산은 생쥐의 말을 믿고 돌을 내준다. 싱거운 해결이라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우유를 구하는 방법을 해결로 보는 생각에 허를 찌르는 의외의 방식은 아닌가? 『생쥐와 산』은 모두의 문제를 예외 없이 풀기 위한 방식을 택하고 있다. 모두 함께 해결하는 오래 걸리는 이 익숙하지 않은 방식은 약속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집단의 힘을 어떻게 만들고, 그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의미 깊은 이야기이다.
사람과 세상 일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가야할지 생각의 깊이를 더하고 싶다면, 이 두 그림의 책장을 천천히 넘겨보시길.
덧붙임
고은채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