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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반복되는 '장애인' 죽음을 접하며......

[편집인 주]

세상에 너무나 크고 작은 일들이 넘쳐나지요. 그 일들을 보며 우리가 벼려야 할 인권의 가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질서와 관계는 무엇인지 생각하는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넘쳐나는 '인권' 속에서 진짜 인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나누기 위해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하나의 주제에 대해 매주 논의하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인권감수성을 건드리는 소박한 글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때로는 촉촉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가가기를 기대합니다

지난 13일 뇌병변과 언어 중복 장애가 있는 송국현 씨가 거주하던 자립생활체험홈에 화재가 일어났다. 송국현 씨는 장애로 인해 미처 화재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17일에 돌아가셨다. 뇌병변 장애를 가진 송국현 씨는 자립을 위해서는 활동지원서비스가 절실히 필요했지만 장애등급 3급 판정을 받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문제제기하기 위해 장애등급제 폐지 기자회견에 참여하고, 이의신청을 하였으나 국민연금관리공단은 이마저 회피하였다. 결국 국가의 자의적인 장애등급 판정으로 자립을 꿈꾸던 송국현 씨는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 되었고, 화재 사건으로 안타까운 목숨을 잃어버렸다.

권리는 함부로 제한될 수 없다

장애등급제는 오직 의학적 기준으로만 점수를 매겨 장애인을 6개 등급으로 구분하여 등급별로 받을 수 있는 복지 서비스를 제한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장애인의 요구와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비인간적인 차별로, 장애인 단체에서 오래전부터 폐지를 요구하던 방식이었다. 존엄한 삶을 위한 권리는 함부로 제한될 수 없음에도 인간에게 점수를 매겨 거기에 맞춰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 발상은 ‘예산이 부족하니’라는 한 마디로 정당화된다. 이는 단순히 장애등급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존 장애인 정책은 자신의 침대 사이즈에 맞춰 작은 사람은 키를 늘려 죽이고, 큰 사람은 팔다리를 잘라 죽인 그리스 신화의 프로쿠르테스처럼 관리와 통제의 편의성에만 기반한 폭력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기존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고 새롭게 도입하겠다는 ‘종합적 판정 도구’도, ‘맞춤형’ 복지도 결국은 제공자의 입장만을 고려하여 예산의 효율성을 내세워 권리를 잘라내는 편의주의적 발상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였다. 허락된 예산 하에서 ‘어쩔 수 없는 삶의 제한’을 조금이나마 필요에 맞추어 풀어주겠다는 발상은 장애 인권 증진이 될 수 없다.

‘일반인’과 다른 ‘장애인’을 만드는 현실은 바뀌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해주었느냐’의 문제가 필요한 것이 제대로 주어졌는가의 문제이다. ‘일반인’과 다른 존재로 장애인을 인식하고, ‘가능한 범위에서 더 일반의 범주에 들어올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장애인은 언제나 ‘장애인’으로 남을 뿐이다. 존엄한 삶에 대한 권리는 모두에게 공평하다. 국가나 사회가 누군가를 ‘장애인’이라 이름붙이고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제한할 수 없다. 2008년 장애인들은 ‘장애인 인권 선언’을 통해 ‘모든 장애인은 자신의 능력을 완전하고 자주적으로 행사하며, 가족, 지역사회 등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속에 어울려 살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요구가 실현될 토대를 마련하지 못하고, 그냥 ‘장애인’으로 개개인을 위치지을 뿐이다. 한달 100여 시간의 활동지원 서비스는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을 ‘100시간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무엇을 하고, 움직일 수 있는 장애인’으로 고정시킨다. 15%에 못 미치는 저상버스 도입율과 1, 2급에게만 주어지는 장애인 콜택시 이용권은 자유롭게 이동하며 사회적 관계를 맺으려는 이들의 요구를 외면한 채 ‘주어진 공간에서만 움직일 수 장애인’을 만든다. 게다가 휠체어 이용자를 비롯해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의 대중교통 이용이 다른 이들에게 불편을 준다고 보는 시선은 주어진 제도 안에서도 그들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을 제약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도 어디냐’라는 시선에 장애인은 체념된 만족을 강요당하고 스스로 ‘장애인’으로 낙인찍는 결과를 가져온다.

누군가 신체적 불편함이 있는 것과 그것이 ‘장애’로 고정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장애는 사회적인 상호 작용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침대에서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은 고정된 장애의 정도일 수 없다. 활동지원 서비스를 제한하는 등의 환경 속에서 방 안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나와 사회와 관계 맺을 권리를 좌절시킴으로써 누군가를 ‘장애인’으로 묶어두는 사회적 결과이다. 거리에서, 극장에서 배제되고 지워진 사람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장애 인권은 ‘장애로 어쩔 수 없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더 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제한한 누군가의 권리를 되찾는 당연한 결과이다. 장애를 개인이 태어나면서 가지거나 후천적으로 생긴 물리적 조건으로 보지 않고 사회적인 상호 작용의 문제로 볼 때 장애 인권은 성립될 수 있다.
[사진 출처] 참세상

▲ [사진 출처] 참세상


‘조금 불편한 것’이 되기 위해서...

장애를 ‘조금 불편한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사회적 환경이 권리의 실현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장애인’은 고정되는 것이고, 인식 전환에 대한 요구는 현실을 외면한 채 ‘장애’를 만들어내는 상황을 개인이 감당할 몫으로 외면된다. 최근 장애인 단체에서는 고속버스 타기 직접 행동을 준비하고 있다. 저상버스, 지하철 엘리베이터 등 이동 수단이 도입되었다고 해서 사회생활을 위한 이동권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음을, ‘할만큼 했다’는 시혜의 시선을 넘어 ‘우리를 이동이 불편한 장애인으로 고정시키지 말라는’ 목소리이다.
덧붙임

초코파이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