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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내가 사는 그집

[내가 사는 그집]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있을까?

“형이 이 시계 줄게, 너 써”
같은 방을 쓰는 ‘형님’이 시계를 줬다. 왜 줬을까?


전날 아침 출소자가 있었다. 갖고 나가지 않는 물건들을 우리는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나눠가졌다. 나는 마침 사려고 했던 운동용 바지와 수건, 티셔츠를 독차지 했다. 어차피 입던 거라 남들은 탐을 내진 않지만 원래부터 남의 옷 받아 입는 걸 개의치 않는 나는 감지덕지다. 내게 시계를 준 ‘형님’은 남들이 탐내던 좋은 이불을 득템했다. 거의 새것이다.

혼자만 좋은 걸 가져서 눈치가 보였을까? 내가 낡은 옷들을 챙기는 게 안쓰러웠던 것일까? 어쨌든 준다는 시계를 딱 잘라 거절하기 애매했다. 선물을 받고 나니 왠지 더 잘 대해 ‘드려야’할 것 같은 느낌! 약간의 돈이나 권력이 알량한 위계를 만드는 이곳에선 사소한 증여가 더 큰 위력을 가진다.

시계는 멋지다. 내가 차고 있던 시계보다(이것도 다른 출소자에게 받은거다.) 좋아 보인다. 안에서는 한 종류의 시계만 파는데 올해부터 시계 종류가 바뀌었다고 한다. 삐까뻔적하다고 감탄 했더니 방 아저씨들이 6천원이나 비싼 건데 좋아야지! 하며 추임새를 넣는다.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버튼이 하나 있어 눌러보니 형광색 불이 들어온다. 무려 야광시계다. “우와! 야광도 돼요.” 하고 놀라워했더니 아저씨들이 웃는다. 아뿔싸. 감옥에선 야광시계가 의미가 없다. 여긴, 불이 꺼지지 않는 곳.

내가 사는 집엔 어둠이 없다. 방에 있는 등은 밤낮으로 켜져 있다. 밤 열시가 되면 취침시간이라고 밝기를 줄이지만 눈 뻑뻑하게 책을 읽을 정도는 된다. 지침에는 42룩스로 줄이라고 돼 있지만 야근자에 따라 밤마다 들쭉날쭉하다. 날마다 불을 줄이는 시간이면 얼마나 어두워지냐에 따라 희비가 갈린다. 좀 더 어둡게 자고 싶은 사람과 좀 더 밝은 불 아래에서 책을 보고 싶은 사람.
[사진 설명] 영화

▲ [사진 설명] 영화 "블루레이 타이틀"중 한 장면,감옥 장면은 캐나다 퀘벡의 빈센트 드 폴 감옥에서 촬영 됐다. 이곳은 실제 감옥으로 사용되다, 현재는 영화용 세트로 쓰여지고 있다.


복도와 건물 바깥에도 불을 환하게 켜놓는다. 물론 감시를 위해서다. 이미 단단한 철창이 있는데 누가 이걸 뚫고 밖에 나갈까 의아했다. 탈옥은 영화나 미국드라마에서만 나오는 얘기 아닌가? 하지만 내가 사는 곳에서 얼마 전, 몇 명의 수용자가 소금으로 철창을 수개월간 부식시켜(지극 정성이다.) 탈출을 준비하다가 발각됐다. 관리자의 입장에서 탈옥과 도주는 항상 당면하는 문제다. 탈옥 보다는, 수용자간 폭력이나 자해 자살 방지가 더 빈번한 목적이다. 그래서 이곳은 항상 밝다. 이제 세 달이 다 되어가는 나는 깜깜한 어둠이 벌써 그립다.

물론, 명백한 인권침해다. 수면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이자 권리이다. 눈으로 들어오는 빛을 막고자 안대나 마스크를 쓰지만 이곳 사람들 상당수가 잠을 설친다. 예전에 한 병역거부자는 감옥에서 한 번도 푹 자본적이 없다는 얘길 했었다. 원랜 3파장 전구를 썼다는데 요샌 전기절약을 위해 LED등을 쓴다. 전구공장을 운영했던 한 ‘사장님’(여기서 나이가 적당히 있는 사람들을 두루 부루는 호칭)은 LED등은 성장호르몬 분비를 촉진시키기 때문에 온종일 쬐고 있으면 몸에 해롭다고 했다. 나는 LED나 삼파장이나 깜빡깜빡 형광등 중에 뭐가 더 해로운지는 모르겠지만 하루 24시간 인공조명 아래에서 수개월, 수년간 선잠을 자는 게 몸에 좋을 리는 없다. 그래서인지 몸에 그림을 잔뜩 그린, 몸이 우람한 ‘형님’들은 너무 쉽게 아프고 너무 쉽게 피곤해한다. 격무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고 온종일 방에 앉아서 수다 떨고 TV보는 게 하는 일의 거의 전부지만 시력보호제나 피로회복제를 달고 사는 이도 많다.

솔직히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불을 끄지 않는 게 좋기도 하다. 비록 불빛이 조금 약하지만 그래도 열 시 이후 취침시간은 하루 중 거의 유일하게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다. 불이 줄어든 이후 2~3시간의 고요한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불을 끄기로 결정이 되면 아마 모두가 똑같이 꺼야 할 것이다. 개인용 스탠드는 상상하기 어렵다. 감옥의 행정은 개인을 배려하거나 대안을 고민하지 않는다. 가령 수용자들의 취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교도관의 구둣소리를 줄이려 복도에 깔던 부드러운 천을 화재 위험 때문에 깔지 않는다고 한다. 나 같으면 구두소리를 줄이기 위해 다른 방법을 강구했을 텐데… 또각또각. 뭔가 문제가 있으면 그냥 없애 버린다. 만에 하나 소등이 된다해도 공부하고 싶은 수용자들에 대한 배려나 대안? 글쎄다.

또 하나 복잡한건 내 스스로 감시를 원하기도 한다는 것. 지금이야 비교적 ‘안전한’ 사람들과 방을 쓰고 있지만 언제든 내게 위협이 되는 사람과도 나란히 누워서 자게 될 수도 있는 곳이 감옥이다. 실제로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한 적이 있고 내게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과 다닥다닥 붙어서 자는 걸 생각하면 꺼지지 않는 불빛은, 그리고 수시로 내가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는 것도 같으니 묘하다.

완전한 소등이 가능할까 주저하게 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 감옥의 원칙을 건드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말했듯 사각지대가 없는 완전한 가시성은 이곳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참고로 푸코에 의하면 근대 이전의 감옥은 깜깜한 어둠속이었다.) 수용자는 언제나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곳의 화장실은 상반신이 훤히 드러나도록 유리창이 투명하고(하체쪽은 반투명이다.) 나름의 존엄을 위해 비닐이나 수건으로 화장실 창문을 가리려는 수용자들과 그 가림막을 치우려는 교도관들은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건물 곳곳의 구석구석마다 거울을 달아 사각지대를 없애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과연 이 원칙에 대한 수정은 가능할까? 내가 너무 감시자의 입장에 서 있는 건가?

보호냐 감시냐를 두고 머리가 복잡해지는 CCTV문제처럼 취침소등은 내게 복잡한 문제다. 독서냐 수면이냐를 떠나서 가장 중요한 본질은 불을 켜고 끄는 것을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실질적인 위험과 감시가 상존하는 밀도 높은 공간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밤에 불 하나를 끄기 위해 무능한 인권위나 헌법재판소에 얘기해야 하는 이곳에서 매일 잠들 때마다 고민한다. 어둠이냐 빛이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하다.
덧붙임

본명은 성민, 이리저리 활동하고 살고 여행하다 2013년 11월 18일 입영을 거부하고 병역거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