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일 현재 기준으로 국방부가 발표한 조사결과(Laboratory Review)에 따르면, 더그웨이 연구소(Dugway Proving Ground)로부터 살아있는 탄저균을 직접 또는 한 차례 이상 건너 받은 실험실은 총 194개이며, 탄저균이 유입된 국가는 미국을 제외하고 총 9개국이다. 9개국에는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영국, 호주, 캐나다,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위스가 포함된다. 미국령 괌, 푸에르토리코, 버진아일랜드도 탄저균을 받은 지역으로 확인됐다. (관련기사 링크)
의문투성이인 미 국방부 조사결과
지난 7월 13일 미 국방부가 전 세계로 살아있는 탄저균을 배송한 경위에 대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살아있는 탄저균이 생산되고 배포된 진상이 명백히 밝혀지기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의문점만 가중됐다.
미 국방부의 조사결과 보고서는 이번 사건을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으며 용납될 수 없는 실수”라고 인정했지만, 탄저균이 어떤 이유로 살아있는 상태로 배송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뾰족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현대 과학 지식의 부족으로 구체적 원인이 식별되지 않았다는 것이 미 국방부의 해명이지만, 이조차도 반론이 만만치 않다. 보고서는 결과적으로 통일된 규정이 부재하다는 것만을 문제 삼아 ‘규정 표준화’를 권고안으로 결론지었다. [2015. 7. 13. 미 국방부 발표 보고서 (Review Committee Report: Inadvertent Shipment of Live Bacillus anthracis Spores by DoD) 링크] 또한 10년 넘게 살아있는 탄저균을 생산해 온 더그웨이 연구소에 대해서는 규정을 지켰다는 이유만으로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았다.
‘현대 과학’으로는 완벽하게 탄저균이 비활성화되지 않은 이유를 알아내기 어렵다면서 ‘규정 표준화’만 하면 사건이 봉합될 듯 내리는 결론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건 발생 100일, 계속되는 의혹
오산 미군기지에서는 무슨 내용의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는지, 왜 주한미군은 사건이 신고된 지 5일이 지나서야 조치를 취한 것인지 의혹은 증폭되고 있지만, 한미 양국의 합동조사는 늑장이다. 한미 정부는 7월에서야 합동 실무단을 꾸렸고 여전히 결과로 나온 것은 없다. 게다가 미 국방부의 조사결과를 볼 때, 오산기지 탄저균 반입에 대한 한미 양국의 합동조사도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9월 발표를 예정하고 있는 한미 합동 실무단의 조사결과는 과연 제기된 의혹들을 해소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주한미군은 “이러한 훈련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게 만든다. 미 육군 관련 책임자들은 주한미군 기지 내 탄저균 반입 및 실험을 내용으로 하는 주피터 프로그램(연합 주한미군 포털 및 통합 위협 인식, JUPITR)이 2013년에 시작됐으며 2014년에 이미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주피터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는 피터 이매뉴얼(Peter Emanuel) 박사는 2014년 12월 인터뷰를 통해 주한미군은 지난 18개월간 반복적으로 실험한 끝에 각 실험실들은 자신의 지역에 적합한 생물식별 장비를 갖췄으며, 미국에서 실시한 야외 실험에 대해서도 시뮬레이션 데이터 분석만 남겨뒀다고 밝혔다. 또한 올해 3월 26일 미 육군 에지우드 화학생물학센터(U.S. Army Edgewood Chemical Biological Center)는 주피터 프로그램 최종 단계의 작동시연(Operational Demonstration)을 위해 오산으로 2톤에 달하는 장비를 배송했다고 밝혔다.
주한미군은 신규 유전자증폭(Polymerase Chain Reaction, PCR) 장비 시연을 위해서 처음으로 탄저균을 들여왔다고 했지만, 정황상 이를 믿기 어렵다. PCR은 약대생이나 의대생이라면 이미 학생 시절 해봤음직한 흔한 미생물 검사 방법이다. 신규 장비라고는 하지만, 이것을 시연하기 위해 굳이 탄저균까지 활용했어야 하는가 의문이다. 오히려 이번 탄저균 반입이 주피터 프로그램의 최종 단계인 작동시연(OD)을 위한 것이었다는 추측이 자연스럽다. 한 발 더 나아가, 최종 단계 시연 이전에 이미 탄저균과 같은 생물무기를 활용한 사전 모의실험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된다.
방어용 살상무기라는 모순
살아있는 탄저균이 생산, 반입된 원인이 규명되지도 않았고, 재발방지 대책도 미덥지 않은 상황이지만, 한미 당국의 주피터 프로그램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만큼은 강고하다. 주피터 프로그램이 “북한의 생물위협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고, 한반도에서의 생물방어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조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미 국방부의 조사결과 발표 직후 탄저균을 활용한 생물무기 방어 프로그램인 주피터 프로그램을 지속하겠다고 발언했다. 한국 정부의 입장 역시 다를 바 없다. 의혹이 해소된 것은 거의 없고 재발방지 대책은 아직 요원하지만, 주피터 프로그램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생물무기 위협도 또 다른 ‘생물무기’로 대응 및 방어할 수 없다. 방어용과 공격용 생물무기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방어용 실험에 사용되는 탄저균이라도 언제든 공격용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살아있는 탄저균이 ‘방어용’이라는 오산기지 야외 실험에 사용되었더라면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한국과 미국 모두 가입되어 있는 생물무기금지협약에서 탄저균의 개발·보유·운송·사용 등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재차 강조되어야 한다. ’방어용’이기 때문에 미군의 생물무기 개발 및 관련 실험은 문제없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탄저균과 대인지뢰, 비인도적 무기에 대한 자세
지난 8월 안타까운 두 건의 지뢰 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북한제로 알려진 지뢰로 인한 폭발사고였고, 다른 하나는 한국산 지뢰로 인한 사고였다. 특히 전자로 인해 남북은 전쟁의 위기까지 치달아야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남측의 것이든 북측의 것이든 대인지뢰 사용이 국제대인지뢰금지협약에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인지뢰는 화학무기, 생물무기 등과 함께 대표적인 비인도적인 무기로 분류된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대량살상을 초래하는 무기를 국제사회는 비인도적인 무기로 보고 생산 및 사용 일체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남북은 모두 분단을 이유로 대인지뢰금지협약에 가입하지 않았고 ‘비무장지대’를 대인지뢰로 촘촘히 무장해두고 있다.
한국은 생물무기금지협약에 가입했으니 탄저균과 대인지뢰 사건은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싶지만, 정부의 태도는 크게 다르지도 않다. 북과의 대치상황에서 미군의 생물무기 반입과 이를 활용한 실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입장이나 자국 군인들과 접경지역 피해를 입더라도 지뢰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평화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무차별적 살상무기의 사용으로 인한 피해를 감내해야 한다는 논리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는 비인도적인 무기를 원천 금지하도록 노력해 온 국제사회의 입장과도 어긋난다.
이번 탄저균 반입 사건에 대한 당장의 해결책은 철저한 진상조사와 함께 생화학무기금지법, 감염병예방법 등 국내법 위반에 대한 엄정한 처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비인도적인 무기를 개발, 생산, 이전하지 못하도록 한 국제협약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분단을 이유로 비인도적인 무기의 반입과 이를 활용한 실험이 합리화되고 단순 사고로 포장되는 것은 결코 또 다른 사건 발생을 막을 수 없다. 탄저균을 활용한 실험은 그 자체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된 사안이다. 이 땅에 살아가는 주민들의 평화적 생존권을 최우선에 두고 남북이 모두 국제조약을 실현하도록 협상하고 이를 이행하는 것만이 근본적인 재발방지 대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이미현 님은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간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