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을 훌쩍 넘겨 아흔을 바라보고 있는 할매가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무대로 올라와 말했다. “오늘까지 함께 해줘서 고맙습니더. 내가 죽더라도 송전철탑 꼭 뽑아주이소.” 할매의 그 말이 훅 들어왔다. 강산이 변할 세월 10년이라는데... 송전탑이 들어설 거라는 소식에 집회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주민들이 한전 밀양지사 앞에 모였다. 꽹과리와 북을 치며 송전탑 반대를 외쳤던 2005년 12월 5일 그날로부터 10년이 흘렀다. 송전탑을 막기 위해 보내온 시간 10년, 두 분의 어르신을 떠나보내야 했다.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밀양을 향했다. 잘못된 에너지 정책이 문제이고,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배를 더 불리는 세력들이 있다는 게 드러났다. 하지만 압도적인 공권력까지 동원하여 밀어붙인 결과, 결국 송전탑은 들어섰다. 2013년 10월 3000명의 공권력을 앞세워 강행된 공사는 마지막 4개 송전탑 부지에 있던 주민들의 농성 움막을 토벌작전 벌이듯 부수고 뜯었던 2014년 6월 행정대집행 이후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이제 밀양 조금만 깊숙이 들어가면 곳곳에서 송전탑이 보인다. 100m 높이의 거대한 송전탑이 산에, 밭에 꽂혀있다. 송전탑을 세워야 하는 이유였던 신고리 핵발전소는 건설이 지연되었다. 각종 비리 문제가 터지고 안정성 테스트에서 떨어져서 그동안은 다른 발전소에서 끌어온 전기로 시험송전만 했었다. 그러더니 지난가을, 우려와 반대 목소리가 계속되고 달라진 건 없는데 신고리 핵발전소의 운영허가 승인이 났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준 10년이었다. 그래서 송전탑이 세워졌어도 달라진 것은 없다. 끝난 게 아니다. 끝낼 수 없다. 투쟁 10년은 맞은 밀양은 새로운 10년을 준비하겠다고 한다. 한 발 더 성큼 나아가기 위해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10년 약사와 함께 밀양에서 확인했던 에너지 정책 문제, 인권침해 문제, 공동체 파괴 문제를 정리한 백서를 발간했다. 10년 동안 한결같이 밀양을 살아낸 사람들의 순간순간을 담은 사진집 <밀양, 10년의 빛>도 출간했다. 그리고 밀양과 손잡았던 사람들을 초대하는 밀양 10년 잔치도 열었다. 한결같이 함께 싸웠던 마을들, 주민들을 격려하면서 시상도 했다. ‘가리늦까 불붙어 활활 타오르다상', '작은고추가 맵더라상', '질긴놈이 이긴다상', '소리없이 강한 할매상', '밀양의 자존심 지켜주신상', '새벽종이 울렸네 힘차게 싸웠네상', ’시작도 끝도 우리가 본다상', '오래도록 질기게 싸우다상', '고통을 딛고 우뚝 일어서다상'... 벌목작업을 막기 위해서는 나무를 부둥킬 수밖에 없었던, 공사 굴착기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목줄을 매고 굴착기 안에 들어갔던, 경찰과 충돌하며 다치고 숨이 차서 수도 없이 응급차로 실려 갔던, 작물을 돌보기 위해 아프고 지친 몸을 이끌고 비닐하우스에 일하러 갔던, 서울부터 부산, 제주까지 송전탑처럼 잘못된 문제들을 바꿔내기 위해 수도 없이 버스를 탔던, 아프고 아팠던 날들은 무수하지만 그런 날들 속에서도 희망을 보고 힘을 얻었던 그래서 웃을 수 있었던 시간들이 있었다고 그 시간들에 함께 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몇 년 전에 찍힌 사진 속에서는 거뭏던 머리가 이제는 새하얘진 할매의 삶을, 할배의 싸움을 들으면서 뜨거워진 눈시울을 훔쳐내기도 하고, 송전탑을 꼭 뽑아내자는 다짐으로 준비한 모형 송전탑이 예상치 못하게 너무 빨리 무너져서 깔깔깔 웃음꽃이 피기도 했다.
밀양 10년 잔치를 다녀오고 얼마 안 된 지난 연말, 정성껏 키운 감과 고추를 수확하면 꼭 챙겨서 사무실로 보내주셨던 밀양 주민분에게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2015년을 보내며 밀양 싸움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한 분 한 분을 느껴보는데, 가슴이 따뜻해진다고 늘 함께 해줘서 고맙고 사랑한다고... 밀양의 그날들에 함께 할 수 있던 것은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진실’과 ‘정의’를 위한 싸움 10년, 다시 다짐을 새기며 밀양은 말한다. “우리는 이미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승리할 것입니다.” 그 승리의 기록을 밀양과 함께 써내려갈 내일이 기다려진다.
“마을 바로 코앞에 765 고압 송전탑이 있습니다. 그 길을 매일 지납니다. 송전탑이 무조건 필요 없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정부는 원칙을 벗어나는 송전탑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10년 동안 끈질기게 투쟁했습니다. 우리를 제압하겠다고 막대한 권력의 지휘 아래 방패를 들고 마을을 침략해 들어왔습니다. 3000명의 젊은 경찰들이 마을을 점령했고 철탑을 건설했습니다. 심지어는 소 잡는 칼을 이용해서 마을과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주민들에게 휘두르면서 쫓아냈습니다. 근데도 한전 직원들과 경찰들은 승진하고 영전하고... 이게 얼마나 웃기는 자장면입니까. 지금은 밀양에 초고압 송전탑이 서고 말았습니다. 온 마을을 둘러싸고 마을에 우뚝 솟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밀양할매할배들은 지지 않았습니다. 거짓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고 진실은 영원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열심히 싸워왔는데, 그날들이 모여서 10년이 됐다고 하니까 감회가 새롭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냥 살던 대로 그대로 살게 해달라는 겁니다. 제발 농사짓고 이대로 평화롭게 해달라는 겁니다. 마을 집 바로 뒤에는 송전탑이 우뚝 솟아있습니다. 그 송전탑은요, 오만하고 방자하게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밀양에 행한 모든 과정이, 계획에서부터 모든 게 오만방자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전제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우리의 요구는 전부 묵살 당했고 돌아온 것은 폭력이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 것 같습니다. 점점 더 어두워졌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걸어온 10년 동안 우리의 요구가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나. 그 세월동안 우리의 눈물과 한숨들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저 오만방자한 송전탑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저것이 무너져내리는 날까지 우리는 이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가파른 날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송전이 시작되는 내년이 저희에겐 더욱 두렵습니다. 앞으로의 10년 투쟁을 더욱 열심히 해야 하는데 우리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처럼 연대자들이 손을 잡아주어야 더 힘차게 싸울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다른 아픔이 있는 곳에 손을 내밀겠습니다. 그리고 바라는 것은 우리 어르신들이 더 늙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송전탑이 뽑히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10년 동안 어떻게 싸웠나 묻습니다. 저희도 사람이라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10년 동안 싸울 줄 알았으면 누가 싸웠겠습니까. 정말 힘든 순간순간에 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셨던 어르신들이 한 명 잡혀가고 나면 그 다음 사람이 또 앞서서 싸우고 그러다보니 독립이 안 되었겠나. 어디 우리가 독립날짜를 받아놓고 싸우는 것 아니잖습니까. 연대자들이 없었으면 한 순간에 무너졌을텐데 손 잡아주셔서 10년까지 싸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긴 싸움이라고 봅니다. 탈핵운동이 활발하게 이어져 나가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어제도 신고리 5,6호기 반핵 시민단체들이 시위를 하더라고예. 삼척이나 영덕 같은 곳도 저희들의 힘이 조금 보태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싸움은 절대 진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전 더 안 세우고 수명 다하면 폐쇄하는 그런 운동 계속 할 겁니다.” - 10년을 회고하며 했던 밀양 주민들의 이야기 |
* <밀양, 10년의 빛> 사진집과 밀양송전탑 반대 투쟁 백서 발간과 함께 밀양 송전탑 투쟁의 기록을 모은 온라인 아카이브도 구축되었다. http://mta.localityarchive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