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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노란리본을 달고 있는 유권자라면

저만치 건널목 앞에 노란리본 뱃지를 단 사람이 서 있었다.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같이 길을 건너려고 달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이었다. 노란리본을 만날 때의 반가움이랄까. 말을 걸 것도 아니면서. 길을 다 건널 때쯤 그 사람의 옷에 달린 뱃지가 노란리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이런 우스운 일이라니.

그때서야 뱃지에 생각이 미쳤다. 왼쪽 옷깃에 뱃지를 다는 사람들은 국회의원이거나 뭔가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한 뱃지였다. 노란리본뱃지는 다르다. 세월호를 기억하고, 아픔을 나누며,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다짐을 담았다. 그리고 평등하다. 그/녀가 누구이든 공감으로부터 연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노란리본으로 통할 수 있다. 총선을 앞두고 노란리본이 일깨워준 평등을 새삼 곱씹게 되었다.

 

 

세월호와 국회

 

2014년 여름, 국회 본청 앞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의 농성이 시작되었다. '농성'이라는 단어도 부담스러워하던 엄마아빠들이었다. 진실을 밝혀달라는 요구가 그렇게나 겁 없는 요구일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곡기를 끊은 유가족 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함께 했지만 가을의 끝 무렵 제정된 특별법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국회는 그런 곳이었다.

국회 농성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정조사특위 위원장을 맡았던 심재철은 특별법에 대한 허위 사실을 당직자와 지인들에게 보냈다. 하태경은 본회의 표결에 앞서 반대 토론을 주도했다. 특별법이 제정된 후로는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 대한 음해가 이어졌다. 김용남은 "국민 세금만 낭비"한다고 했고, 원유철은 "정치 공세만 하려는 것"이라 했고, 황진하는 "불순한 의도"를 주장했다. 300명의 국회의원 중 세월호 특별법을 반대했던 12명은 이런 이들이었다. 그 중에는 인양 결의안에조차 반대 표결을 했던 김진태 같은 인물도 있다.

이들이 모두 20대 총선에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행동을 "비겁한 거지 근성"이라고 말하며 "'시체 장사'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는 비난 글을 퍼나른 김순례는 새누리당의 비례대표가 되었다. 세월호의 하역을 맡아 과적을 일삼았던 '우련통운'의 당시 부회장이었던 배준영은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후보로 나오기도 했다. 선거는 이런 것이었다.

떨어뜨려야 할 후보는 천지 널렸는데 당선시켜야 할 후보는 가뭄에 콩 나듯 보이질 않는다. 이런 선거에서 노란리본을 단 유권자라면 어떤 투표를 해야 할까? 4.16연대는 유권자위원을 모집하며 기억심판운동, 약속운동을 제안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제공했거나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피해자 가족을 모독한 후보들의 정보가 공개되어 있으니 자신의 지역구에 해당하는 후보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들에게 약속을 받아내는 활동을 할 수 있다. 특별조사위원회 활동 보장과 특검 실시,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과 미수습자 수습 등의 과제에 대한 입장을 질의하고 약속을 받는 활동도 필요하다.

 

 

세월호를 볼 때 봐야 하는 것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월호참사의 과제 해결이 막막한 이유는 그저 몇몇 부적격 국회의원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던 당시 유가족들로 구성된 가족대책위는 특별법 논의 과정에 가족 참여를 요구했다. 그러나 국회는 입법이 국회 고유의 권한이라며 가족을 배제시켰다. 입법이 국회의 권한인 것은 분명하나 그것 역시 국민으로부터 부여된 권한이다. 당사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법안일수록 참여를 보장하는 논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재승은 '사건에 대한 권리'를 제안하며, "피해자가 사건해결의 전 과정에 주체로서 참여하여 사태에 대하여 입장을 표명하고, 해법을 제안하고 그 이행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공적인 지위"를 가지는 것이 "그들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최상책으로서 본질적으로 가치가 있"으며 "유족의 참여 속에서 이루어진 해법은 그 자체로 높은 정치적 수용성을 가질 것"이라고 말한다.* 매번 국회의원 총선거를 치룰 때마다 후보나 정당들은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겠다고 앞다투어 손을 내민다. 그러나 당선이 되고 나면 재빠르게 손을 거둔다.

세월호 참사 이후 '청소년의 권리'가 주목받기도 했으나 마찬가지다. 청소년들은 선거 기간만 되면 사라지는 존재였고 지금도 그렇다. 교육정책을 말하는 후보나 정당은 있을지언정 청소년 정책을 말하는 후보나 정당은 없다. 선거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오랜 요구가 있었지만 국회는 한 번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는 물결 속에서도 학생인권법은 지지부진했고 학교 밖 청소년들의 권리는 더더욱 시야에서 사라졌다.

표가 되는 사람들만 챙기는 국회는 피해자들을 배반하기 십상이다. 2014년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에서 국민들의 눈치를 보며 한 번만 도와달라고 표를 구걸하던 여당이 선거 이후 어땠는지 우리는 충분히 봤다. 선거 결과에 자신감을 얻고 버티기로 일관했고 대통령의 가이드라인을 국회의 가이드라인으로 삼았다. 거대 정당이나 후보들이 선거에서 표가 되는 사람들에게만 손을 내미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문제는 '다 알면서도' 그 손을 부여잡으려고만 했던 우리에게도 있다.

 

 

노란리본의 평등을 기억해야

 

선거는 평등하다, 형식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두 표씩을 가진다. 재산의 많고 적음,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 앞에는 수식어가 있다. 일정한 연령 이상의, 국적과 주소지를 가진, 성별이 확인되는, 투표장까지 갈 수 있는, 투표할 시간이 보장되는 … ‘모든 사람’들이 한 표를 가진다. 투표를 해서 권리를 행사하라는 홍보가 넘쳐나고 어느 때보다 정치 참여가 독려되지만 실상 선거기간은 정치에서 소외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세월호는 정치적인 게 아니에요.” 특별법 제정을 요구할 때 유가족들이 많이 했던 말이다. 지금도 세월호에 대해 뭔가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덧붙이는 말이기도 하다. ‘정치’가 거대 정당 간의 다툼을 뜻하는 단어로 전락하고 정치적 입장이란 어느 정당을 지지하는지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 현실에서 ‘정치적인 것’은 부담스러운 말이 돼버렸다. 우리는 정치적인 것의 한가운데에서 정치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 붙잡힌 셈이다.

정치에서 밀려나는데도 정치를 미루게 되는 우리에게 필요한 행동은 현명한 투표 그 이상이다. 선거가 어떤 불평등의 토대 위에 자리하고 있는지 말하는 인권올리고가이드를 살펴보는 것은 노란리본 유권자에게도 중요하다. 참사의 피해자나 사회적 소수자들이 ‘모든 사람’에 포함될지는 선거 밖에서 정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포함될 수 있을 때 다른 정치가 가능해진다. 지금의 정치는 누군가를 배제하며 분할시킨다. 우리가 ‘모든 사람’이 될 방법은 표를 주며 어딘가에 의탁하기 이전에 함께 선언할 ‘우리’를 만드는 것이다. 노란리본이 만들어준 평등은 정치로도 확장되어야 한다.

 

*이재승, <세월호 참사와 피해자의 인권>, 민주법학 제60호(20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