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재활원에서 시각장애와 편마비가 있는 HIV감염인의 재활치료를 거부했다. ‘국가 유일의 중앙재활기관’이며 복지부 소속기관인 국립재활원에서 HIV감염인을 배제했다는 사실은 HIV감염인의 치료받을 ‘권리’의 침해가 얼마나 만연한지를 보여준다.
피해자는 2007년에 HIV확진을 받았으나 부담스러운 약값과 바쁜 직장생활 등으로 인해 항바이러스 치료를 받지 못했다. 면역력이 떨어져 2017년 2월 기회질환을 앓게 되었고, 그 결과 시력을 잃고 편마비가 생겼다. 종합병원에서 기회질환 치료와 안과 치료를 종료한 후 적극적인 재활치료를 위해 국립재활원에 문의하였다. “감염관리위원회 원내 지침에 의하여 역격리에 해당되는 질환을 가진 것으로 확인되어 입원이 안됨을 알려드립니다.”라고 통보받았다. 국립재활원 감염관리지침서에 따르면 HIV감염의 경우 면역력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수치인 CD4가 200미만이면 역격리에 해당하여 국립재활원에 입원시키지 않는다. 역격리란 환자의 면역력이 낮아서 다른 환자나 의료진으로부터 감염에 노출될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격리를 하는 것이다. 당시 피해자의 CD4수치는 200이었고, 피해자가 치료를 받고 있는 종합병원에서는 역격리를 시키지 않고 다인실에 입원하여 하루 1회 재활치료를 받도록 하고 있었지만, CD4수치가 조금 더 오르길 기다리기로 했다. 역격리가 필요하지 않은 상태임을 확실히 하는 게 국립재활원의 우려를 해소하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3개월이 지나는 동안 CD4수치가 200이상 수준에서 안정이 되자 다시 문의하였다. 그러나 국립재활원은 “규정에 벗어나기 때문에 입원할 수 없다”며 “이와 관련된 질환과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일반적 주의지침(universal precaution) 및 표준 주의지침(standard precaution)을 준수하면 HIV감염을 예방하는데 문제가 없다. 또 피해자는 접촉주의, 비말주의, 공기주의가 필요한 다른 감염성질환이 없는 상태이다. 피해자의 면역수치가 200이상으로 역격리가 필요한 상태가 아니므로 다인실입원 및 재활치료가 가능하다. “이와 관련된 질환과가 있어야 한다”는 국립재활원의 논리대로라면 HIV감염인은 감염내과가 있는 종합병원에서만 치료가 가능하고, 요양병원, 정신병원, 치과병원, 1차 병원 등 감염내과가 없는 병.의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이는 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고, 의학적으로도 합리적인 사유가 될 수 없다.
2017년 가을 현재 에이즈정책국면은 매우 비상한 때이다. 10월 10일 ‘에이즈감염 여중생 성매매’라는 MBC보도를 시작으로 국정감사와 부산의 'HIV감염된 20대 여성 성매매 사건'에 대한 보도가 이어진 10월 내내 여.야 국회의원 가릴 것 없이 “에이즈환자 치료에 쓰인 건강보험재정 급증, 국가재정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만을 강조하였고, 부산시의회와 언론은 “치료받지 않는 에이즈환자, 소재파악 안되는 에이즈환자” 운운하며 “감염인 관리 구멍”, “비상”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2008년 에이즈환자의 인권보호를 위해 에이즈예방법이 개정되면서 감염인 명부작성과 비치 제도를 폐지하여 빚어진 후유증”이라는 진단도 나왔다. HIV감염인의 소재를 파악하여 치료를 받도록 해야한다는 발상으로는 HIV감염인들이 치료받기를 어렵게 만드는 사회적 요인과 환경을 살필 수 없다. 복지부 소속 병원에서‘조차’ HIV감염인의 진료를 거부하는 상황에 대해서 누구도 질문도 대책도 말하지 않고 있다.
때마침 10월 9일 ‘유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규약 위원회(UN Committee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가 대한민국을 심의한 후 발표한 최종 권고문(concluding observations)에서 “위원회는 HIV감염인에게 의료행위를 거부하는 의료인력들에 대한 보고에 우려한다 (제12조). 위원회는 HIV감염인이 의료에 차별없이 접근하고 치료를 받음으로써 건강권을 향유하도록 보장할 것을 당사국에 촉구한다.”고 하였다. 또한 유엔 사회권위원회가 2000년에 발표한 ‘도달 가능한 가장 높은 건강 기준에 대한 일반논평(14호)’에서 차별금지 및 동등한 대우와 관련한 조항에 대한 주목을 요청하였다. 해당 조항은 HIV/AIDS를 포함해 성별, 종교, 정치적 견해, 빈곤, 장애, 성적 지향 등의 조건으로 인해서 건강할 권리를 누리는데 차별받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였고, 의료서비스나 자원에 동등하게 접근해야 함을 강조한다.
3차병원에서조차, 시립병원에서조차 HIV감염인을 차별한 사건을 수차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였다. 또 장기요양이 필요한 에이즈 환자들이 갈 수 있는 요양병원이 부재한 상황은 수년째 개선되지 않고 있고 정부는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감염인(HIV/AIDS) 의료차별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HIV감염인 76.2%가 ‘다른 질병으로 병원 방문시 HIV 감염인임을 밝히기 어렵다’고 답하였고, 40.5%가 ‘치료/수술/입원 시 감염예방을 이유로 별도의 기구나 공간을 사용했다’고 했으며, 26.4%가 ‘HIV 감염사실 확인 후 약속된 수술을 기피하거나 거부했다’고 응답한 결과를 통해서 많은 HIV감염인들이 진료거부와 의료차별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환자의 개별적인 노력으로 극복하기에는 의료기관에서의 차별이 너무 만연한 상황이다.
HIV감염인이 경험하는 의료차별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의료기관에서조차 의학적 지식에 반하여 HIV감염인을 배제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사회에서는 직장, 학교, 지역사회 등에서 HIV감염인과 더불어 살기 위한 방안들은 고려되기 어렵다. 또한 HIV감염인을 기피하는 의료기관의 태도는 HIV감염인에게 내적낙인과 차별의 내면화로 이어지고, 이는 자기보호와 권리를 옹호하지 못하게 한다. 한마디로 HIV감염인에게 ‘살맛나는 세상’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한다.
치료는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로써 보장해야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국립재활원의 HIV감염인 진료거부 사건을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적용하여 시급히 구제해야 한다. 피해자는 HIV감염으로 인해 면역기능 저하가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고, HIV감염에 따른 기회질환으로 시력을 소실하여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으며, HIV감염인에 대한 의료차별 등이 만연하여 일상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이 따르므로 “신체적·정신적 손상 또는 기능상실이 장기간에 걸쳐 개인의 일상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초래하는 상태(장애인차별금지법 제2조)”에 해당한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15조는 재화ㆍ용역 등의 제공에 있어서의 차별금지를 규정하고, 제31조는 건강권에서의 차별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특히 제31조는 의료기관 및 의료인 등은 장애인에 대한 의료행위에 있어서 장애인을 제한·배제·분리·거부하여서는 안된다고 규정한다. 시각장애와 편마비가 생긴 HIV감염인에 대한 국립재활원의 치료거부는 위 두 조항을 위반한 행위이다. 복지부는 관리 위주의 에이즈정책 패러다임을 전면 수정함으로써 HIV 감염인이 ‘도달 가능한 가장 높은 건강 기준’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정책 방향을 수립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2017년 11월 6일
HIV/AIDS 인권활동가 네트워크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 /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 러브포원 /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 / 에이즈환자 건강권보장과 국립요양병원마련을 위한 대책위원회 /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PL모임 ‘가진사람들’/ 한국 청소년 청년 감염인 커뮤니티 ‘알’/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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