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 대부분의 내용은 아다치 리키야의 동명의 책 『군대를 버린 나라 : 코스타리카 사람들의 평화 이야기』 (2011/ 검둥소)에서 인용했다.
인권과 평화를 애호하는 이들에게 12월은 유독 의미 있는 날이 많다. 1일은 평화를 위해 행동하다가 감옥에 갇힌 전 세계 병역거부자와 평화 활동가들을 기억하는 ‘평화수감자의 날’이다. 같은 날인 ‘세계 에이즈의 날’은 질병의 아픔에 차별의 고통까지 안고 살아가는 에이즈 환우들의 인권 문제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10일은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을 명문화한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 날로 올해 70주년을 맞는다. 국내 사안으로는 대표적인 반인권 악법인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달이기도 하다. 이 날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찰지 모르겠으나,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 날이 있다. 비록 이역만리 다른 나라 이야기이긴 하나 최근 한반도 상황과 관련해 우리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역사적인 날, 바로 코스타리카에서 군대 폐지가 선언된 날이다.
1948년 12월 1일, 남한에선 서슬 퍼런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던 바로 그 날, 코스타리카 산호세의 육군사령부 요새에서는 망치로 건물을 허무는 의식과 함께 군대 폐지를 알리는 행정명령이 포고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교육부 산하 국립 박물관이 들어섰다. 이듬해 1949년에는 헌법에 항구적으로 군대를 금지하는 조항을 명문화 했다. 냉전의 서막이 열리고 전 세계가 동서 두 진영으로 양분되던 시기에 중앙아메리카의 한 빈곤한 작은 나라에서 뭘 믿고 이런 당돌한 선언을 할 수 있었을까?
코스타리카는 1821년 중앙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과 함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 스페인 통치 시절부터 중앙아메리카의 변방국가로서 고립과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코스타리카는 독립 이후 자립을 위한 방법으로 커피농사를 장려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외국 자본을 유치해 대규모 바나나 플랜테이션 개발에 나선다. 그러나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커피 가격이 폭락하고, 같은 시기에 ‘파나마 병’이라는 바나나 질병의 유행으로 카리브 해안 지역 플랜테이션은 거의 전멸하게 된다. 이때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을 비롯해 도시 인텔리층, 중소 사업자들을 주축으로 사회 개혁의 목소리가 거세게 일어났고 1940년대에 노동기본법과 사회복지 관련법의 정비가 이뤄지게 된다.
그러나 여러 사회 개혁에도 불구하고 정부 권력을 독점한 세력들이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1940년대 내내 이어진다. 그러다가 1948년 대통령 선거 결과를 둘러싼 정파 간 갈등이 발생하고 급기야 내전으로 치닫게 된다. 이 때 약 5주 동안 3천여 명이 사망한다. 다행히 공산당, 국민해방군 등 내전 핵심 세력들이 이른바 오초모고(Ochomogo) 협약에 합의하여 내전을 종식시켰고 최종적으로 국민해방군을 이끈 피게레스가 정치적으로 승리한다. 그가 바로 내전 종식 후 18개월 간 과도정부 수반을 역임하며 군대폐지를 이끌어낸 호세 피게레스 페레르(Jose Figueres Ferrer)이다. 그는 나중에 대통령에 두 번이나 당선된다.
내전을 일으켜 수많은 희생을 만든 장본인인 만큼 피게레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군대 폐지에 대해서만큼은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군대 폐지는 전란에 지친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당시 군대 폐지의 명분은 쿠데타와 시민들의 희생을 막겠다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국가 재건을 위해 자원을 교육과 복지, 의료 등에 우선적으로 배분해야 했고, 따라서 군대에 투여할 재정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당연 말인가. 대부분의 국가에서 벌어지는 모습은 이와 반대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저개발 국가에서 빈곤 퇴치에 재정을 투여하기보다 정치권력을 유지하고자 군대와 무기에 돈을 쏟아 붓고 가난과 내전의 악순환에 빠져 있는지 보라.
군대 폐지 이후에도 몇 차례의 내전과 사변이 있었으나 코스타리카는 다시 군대를 만드는 것을 택하지 않았다. 국경 주민들과 퇴역 군인들의 희생으로 막아 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코스타리카가 선택한 방법은 ‘외교적’ 방식이었다. 주변 국가들의 역학 관계를 이용해 지엽적 분쟁이 아닌 아메리카 대륙 전체 구도로 전환시켜 공격 세력에 대한 주변국의 압력을 이끌어 낸 것이다.
코스타리카식 외교적 분쟁 해결이 빛을 발한 것은 1979년부터 시작된 니카라과 내전에서다. 당시 미국이 지원하는 반군이 코스타리카 국경 지대를 근거지로 삼아 정부군과 맞서고 있었기 때문에 코스타리카는 미국과 니카라과 정부 양쪽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다. 서방의 원조가 필요한 코스타리카로서는 반군을 지원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그렇다고 바로 옆 나라 정부와 적대관계를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코스타리카가 선택한 것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바로 1983년 당시 루이스 알베르토 몬헤 대통령이 발표한 ‘적극적 영구 비무장 중립 선언’이 그것이다. 여기서 ‘적극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중재자로서는 적극 개입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몬헤의 뒤를 이은 오스카르 아리아스 산체스 대통령은 니카라과뿐만 아니라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등 중앙아메리카 3개국에서 내전을 종식시키도록 중재하여 1987년 중앙아메리카 평화협정을 이끌어 냈다. 이 공로로 아리아스 대통령은 같은 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오늘날 국제인권분야에서 코스타리카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국제무대에서 코스타리카의 지지가 있으면 외교적 설득력이 커진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 개입할 때, 심지어 전쟁을 일으키면서도 인권이나 자유를 내세우는 미국도 그 때 마다 코스타리카의 지지를 구할 정도다. 코스타리카는 이를 역이용해 미국이 자국의 노선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한 입 갖고 두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세계 최대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을 군대도 없는 소국이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코스타리카 평화노선은 주변국에도 영향을 끼쳐 1994년 파나마도 군대를 폐지하게 된다.
코스타리카의 군대 폐지는 하루아침에 즉흥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대공황 이후 극심한 빈곤과 혼란을 경험하면서도 그들은 소수가 주도하는 효율 높은 고속 성장을 추구하거나 특정 강대국에 예속되어 먹고 살 길을 찾기 보다는 노동개혁과 사회복지의 확대를 통해 보다 많은 이들이 함께 사는 길을 택했다. 그런 그들의 오랜 노력과 투쟁 과정에서 만들어진 가치관이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군대가 없어야 한다는 너무도 상식적인 결론을 이끈 것이다. 비록 빈부격차, 원주민에 대한 차별 등 나름의 문제도 없지 않지만, 오늘날 코스타리타가 인권, 평화, 환경 선진국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군대가 평화를 지켜주지 않음은 이미 숱한 인류의 역사가 보여준다. 멀리 찾을 필요 없이 코스타리카와 비슷한 시기 전쟁을 경험한 한반도는 이후 병영국가로 치닫았고 인권과 민주주의는 유린되었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군사적 긴장이 높은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코스타리카의 사례는 오히려 군대가 없을 때 전쟁 위협도 줄어들고 인권과 민주주의가 신장될 수 있으며 이는 다시 평화를 보장해 주는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반도 내 평화체제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지금, 남북이 비무장지대 초소를 허무는 모습을 보며 70년 전 코스타리카 산호세 군 기지를 부수던 망치 소리를 그려 본다. 이제 우리도 남과 북이 모두 군대를 폐지하고 한반도가 갈등의 중심이 아닌 동아시아 평화의 중심이 되는 상상을, 아니 이제 그 구체적인 로드맵을 그려야 할 때가 아닐까. 코스타리카의 경험은 우리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蛇足
필자가 잘 아는 인권활동가 한 분의 내년 목표가 국내 인권, 평화, 환경운동 활동가들과 함께 코스타리카에 가서 제대로 그 나라를 경험하고 배우는 것이다. 평소 여행하며 글쓰기를 좋아하는 분이지만, 절대로! 놀러 가려는 것이 아닐 것이리라. 한 번 맘먹으면 해 내고야 마는 분이라 그 행보가 자못 기대된다. 물론 당연하게도 늘 항상 그렇듯이 문제는 재정이다. 돈 한 푼 없으면서도 그 꿈을 접지 않는 포부가 가상하지 않은가? 뜻있는 독지가들의 많은 성원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