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으로 읽는 세상

모두가 싫어한다는 전쟁, 대체 누가 위기를 만드는가?

‘한반도 위기재생산’ 구조를 뒤엎어야

삼성이 스마트폰을 이렇게 많이 팔아치우기 전에는, 싸이가 ‘국제’ 가수가 되기 전에는, 지구인들이 한국을 인식하는 틀은 대부분 ‘북한-남한’, ‘분쟁지역 한반도’였다. 국내에 있을 때는 별로 의식하지 못하다가 외국에 나가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대뜸 ‘north? south?' 되묻는 사람들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야기나, 평소에는 남북문제나 국제정치에 큰 관심도 없는데, 영어학원이나 어학연수를 가면 남북문제나 한반도 위기에 대해서 ’한국인‘으로서 한 마디씩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들은 이런 인식을 반영한 것이리라. 그런데 한국인들이 그렇게 엮이고 싶지 않았던 북핵, 한반도 위기가 다시금 국제사회의 핫 이슈로 떠올랐다. 온갖 외신들이 실시간으로 한반도 위기 소식을 전한다. 현재 상황이 녹록치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1993년 북의 핵비확산조약(NPT) 탈퇴 이후 본격화된 한반도 위기가, 20년이 지난 지금 더 복잡하고 심각한 양상으로 반복되고 있다.


불안한 사람들

지난 20년 동안 한반도 위기는 ‘제재 강화-반발-긴장 고조-타협-제재 강화’를 되풀이해왔다. 이런 20년의 반복된 위기에 사람들은 익숙해졌고, 어차피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도 없다는 무력감은 무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심상치 않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조용하지만 다들 불안하다. 최근 한국 구글 검색 순위에서 ‘북한’ 검색량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핵실험’, ‘북한전쟁’ 등의 용어 검색빈도가 500% 이상 치솟았다고 한다. 이 오래된 문제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꼬여갔으며,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답답하다. 다들 ‘대체 북한이 왜 저러는 거야?’라고 물으며 검색창에 북한을 쳤을 것이다. 마치 정말 불안하고 걱정되는 문제는 금기어가 되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처럼, 위기의 강도에 비해 전쟁반대 목소리가 약한 현재 상황은 오히려 사태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위기와 긴장이 고조되면서 서로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지금, 남·북·미 모두에게 ‘닥치고 평화’라는 죽비도 필요하지만 지금의 이 위기가 결코 우발적이거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오랜 역사를 지닌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방 안에 가스가 가득 찬 상황에서는 불꽃이 튀지 않게 해야 하지만 동시에 창문을 열어 가스를 빼야 한다. 우리의 불안은 대체 가스가 어디서 새는지도 모르고 창문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답답함 때문이기도 하다.


‘한반도 위기’라는 바둑판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1993년에 본격화된 한반도 위기는 앞서 언급한 일정한 양상을 반복해왔다. 즉 한반도 위기의 형상을 틀 짓는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그 구조가 바둑판이라면, 주변국들의 국내 정치 상황, 정권 교체 등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협상, 대결 등은 바둑 수의 변주에 불과하다. 이 바둑판을 뒤엎지 않는 이상, 그 위에 올라온 바둑돌은 어느 한 쪽이 굴복할 때까지 계속 놓여야 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관계는 1980~1990년대의 사회주의권의 변화와 붕괴라는 격변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냉전이라는 이름으로 진영 간의 대결로 그려졌지만,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국가들이 지녔던 제국주의-자본주의 세력에 의한 고립, 포위의식은 사회주의권 역사 내내 이어져온 집단적 심성이라고 할 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북은 국가수립 직후 수백만이 사망하고 물질적 기반이 붕괴되는 파멸적 전쟁을 겪게 된다. 당시 미국과의 전쟁을 직접 겪은 유일한 사회주의국가로서 북이 지니는 역사적 경험은 마치 남한 사람들의 마음 깊이 각인된 반공주의, 빨갱이 증오의 거울상이라 할 만한 것이다. 중국의 참전과 소련의 지원으로 겨우 패전을 면하고 30여 년을 군사적 긴장과 대치 상태로 보낸 후 한반도에 변화가 시작된다. 북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느꼈던 고립감에 비할 바가 아닌 경험을 하게 된다.

중국은 1978년 덩샤오핑의 주도 아래 개혁개방에 나서고 1979년 미국과 수교를 맺는다. 소련은 1985년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면서 기존의 사회주의적 원칙들을 대거 폐기해나간다. 이에 대해 북은 ‘사회주의 완전승리’ 테제를 발표하면서 중국과 소련의 변화를 정면 비판하고 ‘우리식 사회주의’ 건설을 내세운다. 이미 1950년대 중소분쟁 이후, 반(反)사대주의를 표방하며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던 북이었기에(전쟁 이후에 북에는 중국, 소련 주둔군이 없었다) 가능한 태도였다. 하지만 사회주의권의 변화는 곧장 세력균형의 변화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북 역시 미국, 일본, 남한과 관계 개선에 나선다. 1984년에 남북불가침선언과 북미평화협정을 동시 체결하자는 남·북·미 3자 대화를 제의하고, 1987년, 1990년에는 군축을 공세적으로 제기하고 실행한다. 이에 남한 역시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으로 화답하면서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1992년 ‘남북비핵화선언’이 발표된다.

하지만 남한의 ‘북방정책’은 북과의 관계정상화보다는 중국, 소련과의 수교가 목표였다. 1990년 소련에 30억 달러 차관을 제공하며 수교를 맺고 1992년 8월 중국과도 수교를 맺는다. 이런 상황에서 북이 체제를 유지하는 방법은 미국·일본과 수교를 맺음으로써(교차승인) 새로운 세력균형을 도모하거나 핵무장을 통해 독자적인 힘의 균형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북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추진하는데 북이 미국·일본과 관계정상화를 하기 이전에 중국과 소련이 이미 남한과 수교를 맺음으로써 북은 협상의 지렛대를 잃어버린다.(김일성이 직접 중국을 방문해 조미수교 이전에 한중수교를 맺지 않는다는 약속을 얻어내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미국은 이미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이 개혁개방에 적극 나서고 있는 마당에 북과의 관계 개선에 목을 맬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말도 잘 안 듣는 북이 핵무기를 손에 쥐는 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

북은 교차승인 카드가 실패하자, 동시에 진행하고 있던 핵무장을 통해 안전보장을 위한 협상을 시작한다. 북이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안전협정 체결의 대가로 북·미고위급회담을 요구해 이뤄지지만 회담 자체를 대가라고 생각한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더 이상 추진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현재 북이 핵을 이용해 평화협정을 비롯한 체제보장을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과 남한은 대화 자체를 협상의 대가로 내세우는 것과 동일하다. 미국은 북·일 수교 교섭 중이던 일본에게 교섭의 조건으로 NPT 체제에서 인정되고 있고, 이미 일본도 하고 있던 핵 재처리 시설 포기를 요구하게 해, 1992년 11월 교섭을 중단시킨다. 이후 사태는 협상이든, 전쟁이든 오로지 핵무장 카드만 손에 쥔 북과 이를 막기 위한 미국의 20년 대결 역사다. 즉 북은 협상을 하기 위해서라도 핵무기라는 지렛대가 있어야 미국이 대화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북의 전략은 먹혀들어, 1994년에 제네바 합의를 이뤄내고 경수로와 중유를 지원받게 된다. 하지만 제네바 합의는 지루한 줄다리기 끝에 파국을 맞고 경수로 사업도 종료된다. 이후 2차례 남북정상회담, 북미공동선언, 북일 선언, 6자회담 합의 등 수많은 합의와 회담이 이뤄졌지만, 번번이 약속은 깨졌다. 협상과정에서 상대방을 협박하는 수단으로 북은 핵과 미사일 개발을, 미국은 경제제재(식량, 자금, 석유 등) 카드를 내세웠다. 누가 먼저 약속을 깼는지를 가리기 전에, 사회주의권이 사라진 지금, 미국이 사용하는 제재 조치는 특히 노약자를 중심으로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실질적인 공격과 다를 바 없는 효과를 낸다는 것과, 미국은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이 말했듯이 북한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만한 실전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만 일단 지적하자.

북핵을 관리할 수만 있다면, 한반도 위기 상황은 미국에게 손해될 게 하나 없다. 괌에서 출격한 B52 전략폭격기 한반도 훈련, 핵잠수함 샤이엔 부산 입항, B2 스텔스 폭격기 훈련, F22 스텔스 전투기 편대 훈련과 같은 군사적 압박을 북을 빌미로 중국 앞에서 실컷 하고 있다. 동아시아 전체를 시야에 넣고 미군의 전력을 운용하는 ’키 리졸브‘ 훈련은 과거 ’팀 스피릿‘ 훈련이 업그레이드 된 형태로 주한미군을 넘어서 해외 주둔 미군까지 포함하는 동아시아 지역 훈련이다. 주한 미군을 한반도 안팎으로 자유롭게 운용하기 위해 이루어진 평택 미군기지 확장, 동북아 해양에서의 동맹전력 운용의 전초기지가 될 강정 해군기지, 이 모든 걸 조율하고 익히는 ’키 리졸브‘ 훈련과 이 모든 걸 가능케 하는 한반도 위기라는 그림이 한·미·일 군사동맹 세력의 머릿속에 분명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쩌라고!!

가스가 가득한 방에서 불을 붙이겠다고 협박하는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말 모른다는 사실도 우리의 불안을 부추기는 이유이다. 우리는 북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60년 동안 북과 관련된 것에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모진 탄압을 당해야 했던 한국인은, 아마도 지구상에서 북을 가장 모르는 사람들일 것이다. ‘북조선’이라는 국가뿐만 아니라 그 곳에 사는 사람들도 정말 모른다. 중단된 남북교류는 그나마 남아있던 통로마저 막아버렸다. 이런 불안과 당혹감은 위기를 더욱 증폭시키고 정보를 독점하고 왜곡하는 이들에게 더 큰 권력을 쥐어준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차분히 생각해보자. 전쟁이 일어나니 어쩌니 하는데, 우리가 북에 대해서 뭘 알고 있는가, 당장 총부리를 겨눠야 한다는 저 곳의 인민들에 대해서 대체 뭘 알고 있는가. 60년 내내 전쟁하자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 말고 정말 ‘내’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자문해 볼 일이다. 위기라는 지금, ‘국가보안법 폐지! 남북교류 활성화!’ 라는 오랜 구호가 다시 필요한 때다.

또한 문제 해결은커녕 오래된 대결과 협상을 반복할 저 바둑판을 뒤엎을 계획을 차분히 세워야 한다. 지금처럼 일단 북을 먼저 비난하고 그래도 평화적인 우리가 참고 대화하자는 건 너무 현실을 호도하는 게 아닌가? 북을 비난하기 전에 ‘한반도 위기’라는 바둑판에 북을 올려놓은 게 누구인지 직시해야 한다. 자기들 살겠다고 한반도 사람들을 공멸로 이끌 핵무기를 손에 든 북을 막기 위해서라도, 전 세계 사회운동이 미국의 핵에 대한 억제력이 되어야 한다. 어렵지만 그게 옳은 길이다. 그런 지구적 사회운동을 만들어야 할 과제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힘없는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을 집단적으로 겪고 있는 바로 우리들에게 있다.

이 거대한 세계에서는 작은 문제 하나 풀려고 해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모든 게 얽혀있어서 나 혼자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게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생각을 뒤집어 내가 뭘 하려고 해도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그래서 개인의 행동은 결코 개인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 말이다. ‘저들이 하는 말은 이제 그만 듣고 싶다!’, ‘내가 직접 북쪽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한미일이 동북아에서 벌이는 군사행동들은 대체 무엇이냐!’, ‘미국의 경제제재와 군사압박이 북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런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들리기 시작할 때, 저들이 그어놓은 바둑판 격자와는 전혀 다른 흐름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