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꿈이 자주 바뀌었다. 아주 어렸을 때, 6살 아니 5살 때부터 너무 자주 바꿔 다 기억 조차 나지 않는다. 계속 변하기만 하는 내 꿈을 들어주던 어머니도 어느 순간 짜증을 낼 정도였다. 그 수많은 꿈들의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어릴 적 표현으로 의하면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였고 지금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어떤 직업이던 간에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상했다. 내 꿈을 (그 어떤 것이든) 들은 부모님, 선생님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잘해야 한다.' 였다. 문제는 그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길이었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제시한 '훌륭한 사람'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친구를 짓밟고 올라가야 가능했다. "XX는 새벽 두 시까지 공부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못해!(중 1담임)", "왜 너는 OO 보다 성적이 안 나오는 거니?(중 2 담임)" 담임은 성적을 가지고 친구들을 이간질시키기 일쑤였고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거나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는 친구가 생기기도 했다.
대학에 오면 좀 나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한 입시학원이 되어버린 학교는 한 강의에 200여명의 학생을 몰아넣고 여전히 나를 숨막히게 했다. 강의실에서 나는 하나의 예비 상품에 불과했다. 내 존재는 희미해졌다. 친구들은 스펙을 쌓거나 고시를 준비하기 바빴고 나는 그 어느 것에도 적응할 수 없었다. 나는 지쳐갔다. 대학교 1학년 시절, 돌아온 거는 사회공포증이었다. (우울한 얘기지만) 죽음을 꿈꿨다. 정말 죽으려고 한 적도 있다. 삶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 희망이 없었다.
상임활동가로서 입방절차를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새로운 시작과 나의 부족함으로 걱정도 되고 긴장도 되었다.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날카로움으로 한껏 예민해 있을 때, 우연히 사랑방 선배와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그때까지 몇 번밖에 못 만났던 사이였기에 어려워 쭈뼛쭈뼛하고 있는데 상임을 지원했다는 소식에 그 선배가 한마디 했다. " 참 귀하다."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모든 긴장과 고민이 그 한마디에 녹는 듯 했다. 내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스펙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그는 단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았다. 사람을 사람으로 만나주었다. 스물일곱, 이제까지 내가 원했던 건 아주 단순했던 거였다.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