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의정부시 영석고등학교가 종교적인 이유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수 없다고 밝힌 응시생을 불합격 처리해 인권침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영석고등학교는 이 학교에 응시한 ㅇ중학교 3학년 박모 씨에 대해 성적과 관계없이 '국가, 사회, 학교 등의 기본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종교 및 기타 이념을 가진 학생은 불합격 처리한다는 내부 규정'에 따라 지난 15일 불합격을 통보했다. 이에 대해 전교조 의정부지회 등 8개 단체들과 전교조 경기지부는 지난 20일과 22일 잇달아 성명을 발표, "특정 종교를 이유로 학생을 불합격시킨 학교측의 처사는 종교의 자유와 평등권, 교육받을 권리, 행복추구권을 보장한 헌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라며 강력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자 학교측은 박 씨의 '종교' 때문이 아니라 그의 '국가관' 때문이라고 맞서고 있다.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를 이유로 학생의 교육권까지 박탈한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여호와의 증인 한국지부' 홍보부의 정운영 씨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생명이 없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우상숭배로 보고 거부해 왔으며 실제 거부 여부와 관계없이 이를 우상숭배로 보는 것은 일반 기독교계도 마찬가지"라면서 "그렇지만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실제 학생의 교육권을 박탈한 경우는 76년 대법원까지 갔던 김해여고의 사례를 제외하곤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76년 대법원도 학교측 손 들어줘
76년 대법원(재판장 이일규 대법관)은 김해여자고등학교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한 학생 6명을 제적 처분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결한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 사건 징계처분은 …우상을 숭배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종교적인 신념을 그 처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고 나라의 상징인 국기의 존엄성에 대한 경례를 우상숭배로 단정하고 그 경례를 거부한 원고들의 행위자체를 처분의 대상으로 한 것이므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종교의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할 수 없"고, 나아가 일부 학생들의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로 인해 다른 학생들의 국기에 대한 경건한 마음까지 상하게 하여 학교질서에 혼란을 가져올 염려가 있으므로 학교측이 이들을 제적 처분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시
했다.
정운영 씨는 "당시 대법원 판결은 국가주의가 종교에 준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던 시대적 상황하에서 나왔던 것"이라며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동일한 일이 되풀이된 데 대해 어이없어했다.
송기춘 교수(경남대 법행정학부)도 "학교가 동일한 국가관을 학생들에게 요구하거나 자신의 종교에 반하는 행위를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사립학교라고 할지라도 그 규정은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에 구속되어야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미 판례는 경례 거부권 인정
반면 미국에서는 이미 1943년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할 수 있는 것도 헌법적 기본권이라는 판례가 확립된 바 있다. 미 연방대법원은 '월터 바네트 대 웨스트 버지니아 주교육위원회' 사건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한 학생들을 학교에서 내쫓을 수 있도록 한 웨스트 버지니아 국기경례법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잭슨 판사는 당시 판결문에서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 어떤 관리도 정치, 조국애, 종교 또는 기타 의견이 갈리는 문제에 있어서 정통성을 부여할 수 없으며, 시민들에게 그들이 품고 있는 신념을 말이나 행동으로 고백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판례는 90년대 중반 보스턴 라틴 스쿨의 12세 소년 데이비드 스피리츨러가 "모두를 위한 자유와 정의가 보장되지 않는 한, 충성의 맹세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려는 위선적인 선언"에 불과하다며 '충성의 맹세'(Pledge of Allegiance)를 거부해 징계위기에 처했을 때 학교측의 징계를 철회시키는 결정적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지금도 연방대법원에서는 국기를 바라보며 국가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는 '충성의 맹세'가 헌법에 위배되는지를 두고 심의가 진행되고 있다. 올 8월 덴버 연방지법도 공립학교 학생과 교사에게 충성의 맹세를 요구하고 있는 콜로라도 주법의 잠정 봉쇄를 결정했다. 이 같은 소송이 이어지는 것은 9·11 테러 이후 애국주의 물결을 타고 '충성의 맹세'가 국가적 수준에서 강요되자 이에 저항하는 이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
국가주의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야
이처럼 국기에 대한 경례와 국기에 대한 맹세의 강요는 종교의 자유뿐 아니라 국가주의를 거부하는 양심의 자유와도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렇기에 이번 영석고 사건은 학교교육을 통해 국가주의가 일상적으로 강요되고 헌법재판소가 준법서약서마저 합헌이라고 결정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국기에 대한 경례가 자리잡힌 것은 1950년 국무총리의 통첩과 문교부의 국기에 대한 예절에 관한 지시를 통해서였다. 일제 식민지시대 일장기에 대한 경례와 황국신민의 서사 암송을 강요당했던 우리가 해방 후 대상만 바꾸어 고스란히 폐습을 유지시켰던 것.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를 거치면서는 국기에 대한 맹세마저 강요됐다.
평화인권연대 최정민 활동가는 "개인의 내심을 제도교육이나 국가가 외부로 표현할 것을 강제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폐습에 대한 비판은 우리 사회에서 금기에 속한다. 지난 5월 유시민 의원은 "국기에 대한 경례 등은 군사파시즘과 일제 잔재이며 민주공화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는 발언으로 호된 홍역을 치렀다.
송기춘 교수는 "준법서약서 합헌 결정에서 제시된 의견 역시 오랜 기간 동안 국가교육을 '잘' 받은 덕으로 볼 수 있다"며 "국기에 대한 맹세는 이제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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