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해 안 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겠냐마는 그래도 자신의 행동마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제12회 인권영화제. 포스터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처음 이 일을 해보겠다고 찾아갔을 때 누군가 물었다. 인권에 관심 있으셨나 봐요. 글쎄다. 전혀 없진 않고 아마 도만큼의 관심은 있었던 듯하다. 혹시 그럼 학생 때 운동 같은 거 하셨나요. 졸업만이 지상 최대의 목표였던 시절들이 떠올랐다. 그럼 영화 좋아하시나 봐요. 얼마 전 아이언 맨을 감명 깊게 보긴 했는데... 함께 나온 이가 포스터를 붙이는 동안 옆에서 테이프를 알맞은 크기에 떼어주며, 역시 가장 난해한 질문은 나 자신이야, 라는 애매한 결론에 도달할 즈음이었다. 어, M 아니냐? 돌아보니 W였다. 한 직장을 다녔으나 동료라기보다는 적이었다고 하는 게 나을 사이였다. 뭐하는 거야? 내가 들고 있던 포스터를 보며 W가 물었다. 이 땅의 척박한 인권현실에 일익을 담당코자, 라고 말하려다 회사까지 그만 둔 마당에 이제 더 이상 거짓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몇 달 놀았더니 심심해서 자원봉사하고 있어. 새로 장만한 걸까. W의 정장은 몸에 잘 맞아보였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인권영화? 네가? 성과급 지급 전엔 단 하루도 더 일할 수 없다며 그 난리를 치던 네가 돈 안 받고 일을? 배후가 있는 거 아냐? 서른이 훌쩍 넘도록 자원봉사 한번 안 해본 게 마음에 걸렸을 뿐인데 사람들은 늘 배후를 찾았다. 날은 많이 어두워졌고 횃불을 한손에 든 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불들의 행렬만 지켜보았다. 요즘은 여행 안 다니냐? 휴가만 되면 국경선 못 넘어 안달이었잖아. W가 물었다. 요즘은 별로야. 그래 잘 생각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집시 같은 애들 잡아가는 법도 생겼다더라. 넌 어떻게 지내? 나야 뭐 똑같지. 하루 종일 회의하고, 늘 야근하고... 너 회사 그만 둔 지 얼마나 됐지? 한 달? 두 달? 넉 달. 벌써 그렇게 됐구나. 시간이 너무 빨리 가네. 나는 아니었다. 더 오래 된 것 같았는데 고작 넉 달이었다. 우리는 회사에 능력을 판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판 건 능력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어느 소설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회사를 떠난 뒤 시간은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공항의 무빙워크에 있다 내렸을 때처럼. 시간 있으면 영화 보러 와라. 개막작이 파벨라 라이징이라는 영환데 재밌어. 파멜라 뭐? 파벨라 라이징. 브라질 영화야. 브라질? 많이 변했네, 브릭스 펀드에 돈 넣을 줄만 알던 네가. 회사는 어때? 할 말 떨어진 내가 물었다. 말도 마라. 잘 안 돌아가. 사장님이 첨단 경영기법을 도입하려고 해도 직원들이 좀 둔하냐. 너도 잘 알 거 아냐. 이번에도, 30년 이상 장기근속자는 종신고용 하려는데 어린 것들이 반발이 심해. 그래서 알아서 나가게 자율규제 하겠다는 데도 난리야. 역시 소통이 문제야, 소통이. 여전했다. 모든 게. 사장을 위해 일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저 멀리에서는 쥐불놀이가 한창이었다. 아, 그리고 회사 얘기 하니까 생각난 건데, 걔, 결혼한다더라. 걔가 누구냐고 물을 뻔했다. 아마 내일쯤이면 회사에 내 얘기가 다 퍼질 것이다. 내가 거리에서 목격되었다는 전언과 함께, ‘걔’가 나 아닌 다른 이를 택한 건 참으로 다행이라는 맞장구가 복도에 가득할 것이다. 잔인한 질문을 던져 내 반응을 살피는 것으로 W는 언젠가 내가 회사에서 했던 일을 보복하고 있었다. 난 이만 가야겠다. 포스터 뭉치를 들고 어정쩡하게 서있는 옆사람을 보며 내가 말했다. 그래 나도 가야겠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일 분? 이 분? W가 물었고 내가 핸드폰 액정의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아니 사 분. 그럼 잘 가라. 내가 손을 내밀자 W는 회의실에서 내게 자주 보이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결혼식장에서 보자. W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고 나는 다시 포스터를 붙이기 시작했다. 둘의 시간은 다시 다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