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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두 번째 석방, 나는 든든한 백을 가졌다

“구속이 확정되었다. 어젯밤, 나는 얼마나 초조하게 ‘석방’을 기다렸던가. 복도를 지나는 담당의 발소리가 내 방 앞에서 멎기를 바랐고, 그리고 곧 문을 따는 열쇠소리…너무도 간절했나 보다. 그러나 결과는 그랬다. 구속적부심사는 분위기 좋게 진행되었고, 김칠준, 백승헌 변호사는 낙관한다는 눈치였다. 반신반의하면서도 나의 기대 또한 높아졌다.…이제 별 수 없다. 김변이 다시 보석신청을 하겠지만, 거기에 기대지 말고, 본연의 빵잡이로 살자. 두 달 정도 걸린다고 예상하고 말이다. 내키지 않는 감옥살이지만, 내 인생을 통 털어서 내 마음 가는 대로, 내키는 대로 살았던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차분하게 일을 하자. 면회 때도 일을 중심으로 만나자. 이제 내 조건은 결정된 것이 아닌가.”
구속적부심이 있던 다음날인 7월 21일, 내가 머물던 독방에서 일어나 썼던 일기의 일부다. 이번에는 감옥살기가 솔직히 너무도 싫었다. 내가 동의가 되지 않았다. 지난 3월의 구속에 대해서는 불복종운동의 차원에서 실정법을 의도적으로 어겼기 때문에 어느 정도 구속을 인정할 수 있었다. 재판과정에서 평택투쟁의 의미를 알려내고, 인권운동의 관점에서 불복종운동, 저항권의 발동에 대해서 역설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예상 밖으로 석방되었고, 그 동안 구속되지 않기 위해 나름으로는 조심을 했다. 구속되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고, 주위에서 많은 이들이 너무 많이 걱정을 해서다.

수용하기 어려웠던 구속 상황
그렇지만 이번 평화행진 끝 무렵에 터진 돌발적인 상황, 그것도 폭력적인 연행과정과 그 이후 구속영장 청구와 영장실질심사 결과는 수용하기 어려웠다. 평화행진은 순조롭게 가장 평화적인 방법인 함께 걷기 방식으로 여러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 역시 머리를 쓰는 일보다는 몸으로 때우는 게 체질에 맞다는 평소의 내 지론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지역을 지나면서 또는 촛불문화제와 숙소와 식사를 제공받으면서, 우리의 평화행진이 평택투쟁의 또 다른 가능성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을 얻어갔다. 내로라하는 단체 소속도 아니면서 알음알음으로 참가했던 많은 행진단원들의 진심어린 마음이 모여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평화에 대한 마음들을 모아내는 것, 지역에서는 평택 사안에 대해서 충분한 정보도 없고, 어떻게 이 투쟁에 결합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는 상황이므로 함께 만나고 토론하고, 같이 기획하면 범대위 차원에서 할 수 없는 풍부한 내용의 투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그런 생각도 많이 들었다. 세상은 미사일 문제에 온통 쏠려 있던 그런 상황이었지만 북한의 미사일 문제도 결국은 남한에서 전략적 유연성을 관철하려는 미국의 의도를 파탄시키는 것으로 풀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행진단의 어린 친구들과 문정현, 규현 형제 신부를 비롯한 연로자까지 연령층만큼이나 다양한 스펙트럼의 생각을 가진 참가자들과 같이 만들어 갔던 행진단의 경험, 내가 가진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는 줄도 모르고 걸으면서도 나름으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어설프게 춤도 추고는 했던 그런 과정들은 너무도 소중했다. 평화롭고도 즐거운 행진은 그러나 결국은 목적지인 대추리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평화행진은 중단되고…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있기에 7월 8일 평화행진단이 팽성상인연합회 측의 폭력상황, 그를 수수방관한 경찰들, 그리고 원정 3거리에서 막힌 주민들의 분노와 밤샘 길거리 농성의 과정, 이에 항의하기 위한 평택경찰서 앞의 항의농성의 과정에 대해서는 다시 거론하지 말기로 하자. 이 전 과정에서 내가 가장 고심한 것은 행진단 대오의 안전이었다. 그래서 평택 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결정도 하였고, 평택경찰서 앞에서도 빨리 농성을 정리하기로 했다. 나중에 연행되고 나서 그날의 전 과정에서 충분히 책임지는 결정과 그에 따른 행동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자책감이 밀려왔다. 좀 빨리 결단하고, 행동하였더라면 그날의 폭력적인 연행과정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평택경찰서로 갈 때 후미에 처지지 않았다면 앞에서 대오가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도 함께.
같이 구속적부심을 받고 수원 남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석방되던 덕진과 용석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책임을 지면 같이 져야지 형만 두고 어떻게 자신들만 나갈 수 있냐고 우는 녀석들을 등 떼밀어 내보낼 때도 같이 나가고 싶었다. 다행히 행진단은 원정 3거리까지 행진을 재개하여 감동적으로 지킴이 대회로 마무리했다고 하고, 다시 전북에서 자전거 행진이 시작된다고도 하지만, 평택 투쟁 판을 새로이 짜야 하는 등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평택 투쟁만이 아니라 인권단체연석회의의 사업도, 이런저런 연대활동들도, 그리고 인권재단 사람의 일들도 다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도 많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한미 FTA 반대 투쟁도 있지 않은가. 오죽 하면 그 날 밤에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광화문의 투쟁 대열 안에서 비 맞으며 있는 꿈을 다 꾸었을까.
유치장 안에서, 그리고 수원 구치소 안에 있는 동안 내내 비가 내렸다. TV를 통해서도 실감이 났다. 독방은 새벽이면 서늘한 기운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감옥을 살고자 하는 의욕이 나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면회 오는 사람들이 그런 눈치를 이미 채고 있었을 정도로 티를 많이 냈던 것 같다. 그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의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많은 이들이 이러저러한 매체를 통해서 나의 구속을 규탄하는 글들을 썼다. 탄원서도 많이 모였고, 성명서도 많이 나왔다. 그런 결과로 남들은 한 번도 힘들다는 구속적부심을 통한 석방을 넉 달 사이에 두 번씩이나 얻어냈다.

두 번씩이나 구속적부심 석방이라니
7월 21일, 나는 석방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장기간의 감옥살이를 위한 준비를 하기로 했다. 구입해야 할 물품 목록도 뽑아보고, 해야 할 일도 목록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오전 운동을 나갔고, 점심도 먹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옆방 조폭에게 편지지, 편지봉투, 우표 석장을 빌려 바깥에 편지를 쓰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원고도 써야지 하고 말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동 소지가 오더니, 나오라고 한다. 누가 면회 왔겠지 했는데, 짐 싸서 나오란다.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고 물어서 확인했다. 그리고 그날 밤 인권활동가 등 평소 보고 싶던 많은 이들과 새벽까지 술 마셨다. 저마다 내 석방에 대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의 열망 덕분에 내가 나올 수 있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 혼자 힘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많은 빚과 신세를 지고 산다, 평생을 다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나. 그래서 난 고작 이런 소리나 했다. “이번에는 너희가 들어가라. 그럼 내가 석방운동 제대로 할게.”
22일 4차 범국민대회에 다녀왔다. 많은 사람들이 내 석방을 신기해하기도 하고, 부러워했다. 무슨 백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도 하고, 모두 인권단체에 가입하자고도 한다. 그렇다. 난 든든한 백을 갖고 있다. 인권활동가라는 든든한 백을 갖고 있다. 그래도 이번에는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 연행되면 어떤 백도 통하지 않고, 반드시 구속될 것이므로. 평택 투쟁으로 싸우다 구속되더라도 제대로 싸우다 구속되어야 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을 피해가지는 않을 생각이다. 구속 기간 중에 이후 평택투쟁에 대한 나름대로의 계획도 세워보았다. 언제고 저들은 잔인한 폭력을 동반하는 강제철거를 들어올 것이고,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으므로 서둘러서 사람들과 의논을 해야 할 것 같다. 다시 바빠지겠지. 아무리 바쁘더라도 노심초사, 걱정해 주신 분들에게 인사는 하고 살아야겠다, 평화행진 갈 때 도움 주신 분들에게도.

인사는 제대로 하고 살아야지
너무 얘기가 길어졌다. 지난번에도 생각했지만, 이번 구속 중에 더 없이 절실하게 느꼈던 것은 구속은 신체를 어느 공간으로 가두는 것, 그리고 만남을 차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손잡고 싶고, 얼굴 부비고 싶은 딸들을 유리 벽 너머로 안타깝게 바라만 보아야 하는 그런 것이다. 영치물 하나 받으면서도 지문날인 문제로 옥신각신하며 싸우는 등의 관행화된 반인권 시스템과 부닥치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며칠 되지 않는 구속이 힘들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구속이 장기화될 때 대추리, 도두리에 강제철거가 들어오고, 그로 인해 잔인한 국가폭력이 재연되었다는 상황을 나중에서야 들었을 때를 상상할 때였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 괴로운 얘기를 듣고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나의 자리는 분명히 감옥이 아니라 대추리, 도두리여야 하는 것인데, 그곳으로부터 강제로 격리되어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내 석방이 가장 다행스러운 일은 대추리, 도두리 강제철거를 막기 위한 투쟁을 나도 같이 준비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는 것이다. 이 기회를, 어떤 역할이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인권활동가들이 몸 바쳐 투쟁하며 잡아낸 평화적 생존권이라는 화두를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또 일정들이 정신없이 짜이고 있다. 바쁜 중에도 대추리 이장은 구속 상황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나만 두 번이나 석방되었다고, 죄송한 마음으로 대추리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에 참석해서 인사해야겠다. 그리고 평화행진단 사람들과 함께 뒤늦은 뒷풀이를 제대로 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