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4개월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인권운동사랑방에 첫 발을 들여놓았을 때 느낌은 ‘조용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어수선하고 그러면서도 쾌활하다’는 것이었는데, 난생 처음 인권사회단체의 사무실에 들어선 느낌 그 이상의 생경함이었다. ‘조용한 가운데 어수선함’은 곧 ‘가난(?)한 가운데 분주함’으로 재정립이 되었지만 ‘쾌활함’은 아직도 내게 숙제로 남아 있다.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가 선생님들이 쓴 글을 보면 모두 심각하게 고민하는 언어들뿐이었는데 실제로는 대단히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내 시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 아직도 나는 세상을 물질로 저울질하던 못된 습관을 다 버리지 못한 때문인 듯하다.
이렇게 낯설게만 느껴지던 젊은 활동가들을 곁눈으로 바라보면서 내가 100여일 동안 보고 듣고 배운 것은 43년 동안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모두 뒤집어엎어 버렸다.
43년 동안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서 살아온 내게 남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즐거움을 가르쳐주었다는 ‘군내 나는 표현’으로는 아무래도 내가 배운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다. 자신의 고민보다는 남의 고민, 세상의 고민을 먼저 하면서 살아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것과 공부하고 고민하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도 적절치가 못하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는 말은 너무나 통속적이다.
그럼 내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배운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 것은 아닐까. 어쩌면 사랑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눈과 귀로 듣고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전과자임을 밝히고도 이처럼 사람다운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것이 나를 피켓을 매고 국회의사당 앞으로 나가게 한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등뒤에는 인권운동사랑방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다는 믿음이 내게 크나큰 용기가 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인권운동사랑방이 내 안방 마냥 편안하지는 않다. 본인의 선택에 의해 양심을 실천하고 계신 많은 선생님들(나는 활동가들을 개인적으로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앞에 비양심적인 삶만을 살아온 나 자신의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이기도 하겠고, 가끔씩 고개를 디미는 불규칙함과 ‘젊음’ 속에 끼인 ‘어중간함’도 한 몫을 하고 있겠지만, 감호소만을 생각하고 감호자만을 생각하는 나로서는 인권운동사랑방의 그 많은 고민을 모두 쫓아갈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로지 감호자의 고민만을 듣고 싶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감옥에 갇힌 자의 목소리만을 듣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감옥의 인권이 한 단계 발전됨으로써 우리 사회 전반의 인권을 한 단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거창한 목표는 없다. 민주주의가 곧 인권을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에 살지만 뉴스의 초점이 되는 인권이 아니면 여전히 주목을 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나는 언제까지나 감옥 안의 사람들에게 동료이고 싶다. 다시 범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출소자일지라도 나는 그의 동료인 ‘빵잽이’고 싶다.
인권운동사랑방에 오면 나를 ‘빵잽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물론 인권운동사랑방의 문을 연 서준식 선생님 같은 의미의 ‘선생님’은 아니지만 나는 이런 호칭이 낯설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아들 앞에서, 내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이렇게 불리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게 이런 희망을 안겨준 인권운동사랑방의 모든 선생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