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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상임활동가의 편지하나] 세계사회포럼 참가기

인도 독감은 지독했다. 제4회 세계사회포럼 참석 차 인도 뭄바이를 방문했던 한국 참가단의 다수가 감기에 걸렸다. 한국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고, 폭설이 내리는 혹한기였지만 뭄바이의 겨울은 한낮에 영상 31도, 밤중에는 영상 15,6도였다. 큰 일교차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감기에 걸려 끙끙 앓았다. 인도, 아니 뭄바이의 감기는 며칠 더 앓으면 떨쳐버릴 수 있겠지만, 뭄바이 기행에서 얻은 숙제는 좀처럼 풀리지 않을 것 같다.

오늘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단지 인도의 한 끝자락을 열흘간 보고 느낀 인상기에 불과하다. 이번에 뭄바이에 간 것은 제4회 세계사회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무슨 분명한 목적을 갖고 갔다기보다는 아무 준비도 없이 관찰자의 입장이 되어서 참가했다. 한국 참가단의 경우 이주노동자 선전전을 펼쳤던 일하는 사람들의 남병준, 불안정노동철폐연대의 정지현 등의 사람들과, 코파(KoPA)의 실무자들 외에는 그렇게 준비된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3개월간 준비하고, 대규모로 참여했던 ‘다함께’는 이번 포럼에서 주목을 많이 받았다. 폐막식 행진은 “All Together" 피켓이 물결쳤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과연 세계사회포럼이 내건 구호였던 “Another world is possible”에 걸맞는 대안을 제시했다고는 볼 수 없다. 다양한 의제들과 그에 따른 논의들이 무성했고, 이런저런 논의들을 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마련한 것 외에는 사실 전세계의 활동가들이 호소문을 통해 올해 투쟁 일정에 합의했던 것밖에 없다.

그 말 많은 세계사회포럼 얘기는 다른 지면(특히 인권하루소식)을 통해 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기실 세계사회포럼보다는 뭄바이 거리와 시장, 그들의 동네 등에서 느낀 점이 더욱 생생하다. 보고 듣는 그 현실들 속에서 인권운동한다는 나는 세계사회포럼에서 던지는 수많은 의제들과 그 논의들보다도 더욱 구체적인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해야 했다. 일종의 ‘문화충격’ 같은 것이었다.

2

뭄바이에 있는 열흘 동안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것은 한국의 상황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는 장모님, 그로 인해 노심초사할 마누라 때문이 아니었고,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공항에 내린 순간부터 공항을 떠나올 때까지 뭄바이의 거리에서 만난 거지 아이들과 모든 생활을 길거리에서 하는 사람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낮 시간에 거리에서 만나는 그 사람들은 밤이면 거리의 어디이건 간에 누워 잠을 잤다. 새벽녘 일부러 나가 본 거리에는 층층으로 그들의 잠자리가 다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로 치면 노숙자들일 터인데, 그 수가 너무도 많았다. 거리의 바닥에 맨몸으로 자는 사람들, 무엇이라도 깔고 덮고 자는 사람들, 천이나 비닐조각으로도 하늘을 가리운 사람들, 녹슨 양철판으로 채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 득시글거리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에게 좁은 집 한 칸은 얼마나 큰 것일런지 모른다. 그 거리에서 그들은 구걸하고, 노동하고, 애 낳아 구걸시키고, 그렇게 한 평생을 늙어 죽는 것이었다(나는 보지 못했으나, 진관스님은 장례식 치르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거적때기에 둘둘 말아 어깨에 말아서 그대로 땅에 파묻더라고 했다.)
낮의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 거리에 빈부의 차이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지만, 아무도 거기에 대해 의식하지 않았다. 옷차림과 얼굴 때깔부터 달라 보이는 여러 층의 사람들이 그대로 혼재되어 공존했다. 개와 소가 거리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고, 그들의 똥이 거리 곳곳에 방치되어 있어도 하나 어색하지 않은 듯이 그들은 그 거리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거리를 다닐 때는 밑을 잘 보고 걸어야 한다. 설사 똥이라도 밟지 않을까, 그냥 무엇인가 덮인 한줌도 안 되어 보이는 불룩한 것이 거리 사람들이 안식을 취하는 상황일 수도 있으므로. 거지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했다. 관광안내 책자에도,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도 공통적으로 거지를 매몰차게 대해라 했다. 정말 그랬다. 전철역 주변과 버스 정류장 주변과 시장통과 심지어는 포럼이 열리는 행사장 주변에도, 택시나 오토릭샤가 멈추는 그 잠시 동안에도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르게 3~4살의 어린애로부터 아이를 안은 애 엄마까지 달려 나와서는 손을 내민다. ‘No!’라고 말해도 아주 집요하게 그들은 발을 만지는 경의를 표하면서 돈을 구걸했다. 한눈에 봐도 영양상태가 무척 좋지 않아 발육이 더딘 너무도 자그마한 아이를 둘러 업은 땟국물이 꾀죄죄하게 흐르는 애 엄마는 그 큰 눈을 껌벅이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래 보니 뭄바이의 사람들은 애들이나 어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눈이 컸다. 눈이 커서 더욱 가련해 보이는 그들이었다. 돈을 한푼 주고 싶어도 주위에 누가 있나 없나 보고 도망치듯이 손에 건네고 뛰어야 봉변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뭄바이는 인도에서 가장 발전한 곳이라고 한다.
그곳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빈곤의 문제였다.

3

우리가 묵는 호텔은 아주 좋은 곳은 아니지만, 우리가 열흘 묵는 데 쓰는 돈이 그들의 한달 생활비였고, 그렇게라도 소득을 올리는 사람은 정말 잘 사는 축에 속했다. 우리가 묵는 호텔은 공항 근처였다. 옥상에 올라가면 막 이륙한 비행기의 굉음이 고막을 찢을 듯했고, 돌팔매로도 비행기를 맞출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것을 불편해 하거나 문제 제기하는 사람들은 없어 보인다. 그것도 일상의 한 면일 뿐이다. 그러나 옥상에서 정말 볼 수 있는 충격적인 모습은 그게 아니었다. 해가 뜨기 전후로 물 한 통씩을 들고 나오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철로변에 엉덩이를 까고 앉아 큰 일을 치렀다. 바로 옆을, 전철을 타고 사람들이 지나가고, 여자들이 그것을 보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갖고 온 물통으로 똥구멍을 닦고는 가버렸다. 그들이 싸는 똥의 구체적인 형상과 빛깔마저도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전철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은 뭄바이에서만이 아니라 인도 전역에서 목격할 수 있다고 했다. 꼭 철로변이 아니어도 말이다. 왜 그들이 동네에 있는 공중화장실을 이용하지 않고 철로변에서 변을 보는지 해답을 알지 못한다.

앞서도 잠깐 말했지만, 뭄바이는 1천4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는 대도시다. 그 도시의 남부는 매우 다르다. 남부에는 뭄바이항을 중심으로 서구 제국주의가 침략해 들어왔고, 가장 서구화되어 있다. 고색 창연한 중세식 건물들이 즐비하고, 바다를 따라서는 현대식 고층건물들이 빽빽하다. 그곳의 건물임대료는 뉴욕이나 도쿄에 맞먹는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인터넷 환경을 비롯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세계 유수의 다국적기업들이 진출해 있다고 했다. ‘인도의 문’ 바로 옆에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타지마할 호텔이 있고, 그 거리 주변은 유럽의 거리를 걷는 듯한 착각을 자아낸다. 그곳에는 오토릭샤도 없고, 나름대로 청소도 되어 있고, 북부 쪽에 비해서는 상당히 깨끗한 거리지만, 거지와 한낮에도 노숙자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시장에 들어가 보았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 근처의 산타크루즈 역 주변의 시장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동대문, 남대문 시장과 같은 릭키 로드, 힐 로드, 크로포트 마켓 등지를 둘러보고, 몇 가지 물건도 사고는 했다. 시장에는 각종의 물건들이 즐비했다. 그렇지만 정찰가격은 없었다. 그들은 우선 몇 배나 높은 가격을 불렀다. 1백 루피 정도 하는 것을 1천 루피까지 불렀다. 여행객들은 그들의 봉일 뿐이었다. 흥정을 하다보면 1천 루피짜리 물건이 어느새 2,3백 루피로 떨어진다. ‘라스트!’를 외치지만 흥정을 거부하고 뒤돌아서는 손님에게 살짝 다가와 몇 십 루피 더 깍은 값을 부른다. 그래서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턱 사면 그것도 결국은 비싸게 산 꼴이 된다. 뭄바이의 가격이라는 것은 전철 요금이나 버스비, 호텔이나 레스토랑의 정가표를 제외하고는 모든 게 이런 식이었다. 택시요금도 오토릭샤의 요금도 미리 흥정을 해서 결정해놓고 미터기를 꺾지 않으면 바가지를 쓰게 되어 있다. 특히 세계사회포럼이 열리던 그 주변에는 세계에서 몰려온 어리숙한 여행객들을 잡으려는 택시, 오토릭샤 운전사들의 횡포가 너무 지나쳤다. 평소 10여분에 10루피하는 거리를 빙빙 돌고, 돌아서 100루피에 가기도 하고 말이다.

시장의 풍경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리 많은 사람들이 밀려서 왔다 갔다하는 그 골목길을 버젓이 벤츠차를 몰고 다니는 족속들이 있고, 거기에도 소가 있고, 개가 누워 잔다는 것이다. 인도 전통 복장을 벗어버린 청바지 풍의 아가씨들이 핸드폰으로 연인과 연락하고 데이트를 즐긴다. 그들은 맥도날드나 세계적인 커피체인점 등을 이용했다. 인도풍의 복장을 한 여인들이 있는가 하면 검은 베일을 두른 이슬람식 복장의 여인들이 있고, 그렇게 뭄바이의 시장은 그렇게 현대와 전통이, 부자와 빈자가, 그리고 사람과 동물이, 그리고 각종 종교가 뒤엉켜 있는 매우 혼란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거리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눈에 두드러지는 것은 그런 속에서도 사람들은 짜증을 내거나 멱살잡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토릭샤는 도로를 종횡무진 질주했다. 이 질주는 아찔아찔한 컴퓨터 게임을 현실에 옮겨놓은 것처럼 곡예운전, 난폭운전이 기본이다. 안전거리는 겨우 10cm, 잘 보니 백 미러도 없다. 자동차들도 정신없이 오간다. 그 자동차들에는 백미러가 없다. 참 희한한 것은 중앙 분리대가 있는 큰 도로 외에는 중앙선이 없고, 중앙선은 수시로 변동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차선도 별도로 그려져 있지 않고, 표지판도 무척이나 귀했다(전철에도 역을 표시하는 안내 표지판이 없을 정도). 그런 거리를 오토릭샤는 매연을 뿜어내며 질주했다. 오토릭샤가 뿜어내는 매연으로 공기는 혼탁하고 거리에는 유난히 먼지가 많았다.)

4

뭄바이를 떠나기 전날에는 그곳에 사는 한 천주교회 신부의 안내로 인근의 빈민촌을 방문했다. 빈민촌은 우리나라 1960~70년대의 판자촌을 연상하면 대체로 비슷했다. 그들의 집이라는 것은 녹슨 양철판으로 지붕과 벽을 만든 정도이고, 여러 가족이 좁은 공간에서 같이 사는 경우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거리에서 수많은 노숙자들의 구걸형태를 보아온 우리로서는 그런 빈민촌의 모습은 새로울 것도 없었다. 다만 그 빈민촌의 한 구석에 자리잡은 공립학교는 충격적이었다. 한 절벽 공터에 10여 칸의 2층 건물이었는데, 그곳에는 초, 중, 고 과정과 교사양성과정의 학생 등 3천명이 다니고 있었다. 교실은 벽이 따로 없고, 합판을 기대어서 분리해 놓았다. 좁은 교실에는 겨우 사람 하나가 다닐 정도의 공간으로 분단을 지어놓았고, 선생님의 칠판 바로 앞이 아이들의 책상이었다. 한 교실에 90에서 1백명. 20평 정도나 될까 싶은 공간이 3천명이 이용하는 운동장이었고, 작은 도서실에는 전체 책이 3백권이나 될까 싶었다. 그 열악한 현실에서 아이들은 웃고, 짓까불었다. 그곳 교장선생님은 우리에게 학교를 개방하면서도 은근히 걱정이 되나 보다. “다 보시되 우리를 비웃지는 마십시오. 그러면 저의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왜 우리가 그 교장선생님을 비웃을까. 그렇지만 그 학교를 보니 정부의 처사가 괘씸했다. 아이들 교육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정부의 태도에 부아가 인다. 세상의 정부들은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다.

5

마음 편하지 않았던 뭄바이의 인상기를 이제는 정말 끝내야겠다. 뭄바이에서의 열흘 동안 난 인도에서 말하는 종교가 기실은 민중들의 빈곤한 삶을 체념하게 하는 지배이데올로기일 수 있다고 느꼈다. 인도에서 영성을 말하기 전에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본다면, 그 종교와 영성으로 민중들의 분노를 잠재우고, 불가촉천민 집단인 달리트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처럼 길들이게 할 수 있음부터 먼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1등칸과 2등칸이 나뉘어 있는 전철에서 보이듯이 확연한 계급적 질서가 있고, 그 계급적 질서는 곧 빈부의 격차이고, 또 카스트에 의한 구별일 터였다. 그 빈곤에 찌든 많은 이들의 주거, 교육, 건강, 사회보장, 노동의 권리 등등에 대한 답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인도만이 아니라 전세계로 확산되는 빈곤의 문제에 대한 답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이 빈곤으로부터의 탈출, 극과 극의 빈부격차로부터의 탈출, 그리하여 경제적 정의와 평등이 이뤄지는 사회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끊이지 않았다.

뭄바이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세계사회포럼은 행사장 담장을 결코 넘어오지 않았다. 인도조직위에서도 뭄바이 민중들과 함께 하려는 노력도 없었고, 포럼에 참여한 운동가들도 그런 생각이 없었다. 대중들과 함께 하는 반신자유의, 반전투쟁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실패한 채 민중들의 위에 군림하는 전세계의 내노라하는 운동가들이 모여 한판 자신들만의 페스티벌을 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뭄바이에서 인권운동한다는 나의 위치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졌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동지는 어디에 있는가, 인권운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이 물음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아직은 아무 것도 모르겠다.

아직도 인도 독감은 내 몸을 괴롭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