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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문헌읽기] 그루트붐 추모 강연; 법원, 책임성과 참여 민주주의(제프 버들렌더, 2010년 10월)

2009년 1월 20일, 서울 한복판에서 6명의 생명이 불길에 쓰러졌다. 잘못된 재개발을 바로잡아달라고 외치던 철거민과 그를 진압하던 경찰이었다. 뉴스를 듣고 달려가 본 현장은 박살난 유리가루와 매캐한 그을음으로 난장판이었다. 그곳은 눈에 익은 골목이었다. 10여 년 전 사무실이 있던 곳 근처 시장골목이었던지라, 찬거리며 군것질 거리를 사러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 사는 사람, 살고자 하는 사람을 함부로 내쫓는 법은 없다는 것이 주거권이라는 인권의 제일 원칙이다. 그 제일 원칙이 무너진 곳에서 사람은 살아갈 도리가 없다.



집 잃고 가게 잃은 사람들은 영혼이 쉴 집도 얻기 힘들었다. 장례는 355일만에야 치러질 수 있었다. 그래서 올 1월은 용산참사 2주기지만 장례를 치룬지는 1년이 되는 이상한 산수가 적용되는 때이다.

용산참사가 있기 몇 달 전(2008년 8월), 지구 저쪽 편 남아공에서 먼저 떠난 영혼이 있었다. 아이린 그루트붐(Irene Grootboom), 그녀 역시 집 없는 이였다. 모든 부고기사가 마음 저미는 것이겠지만, 그녀의 부고기사에는 “집 없이 무일푼으로 죽다”란 제목이 붙어있다.

아이린 그루트붐(Irene Grootboom)의 모습<br />
[출처: www.writingrights.org]<br />

▲ 아이린 그루트붐(Irene Grootboom)의 모습
[출처: www.writingrights.org]



하지만 그녀 자신은 무일푼이었을지 모르나, ‘그루트붐 판례’란 큰 재산을 전 세계 이웃들에게 남겼다. 그루트붐 판례란, 사람은 헌법상 보장된 주거권을 가지며, 국가가 취약 계층의 주거권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헌법상 국가의 의무 위반이라는 남아공 헌법재판소의 판결이다. 이 판결을 이끌어낸 싸움에 앞장선 이가 그루트붐이었다. 그루트붐 판례는 강제퇴거와 철거가 벌어지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인용되고 있고, 이 사건에 대한 연구물은 경제사회적 인권의 핵심주제를 차지하고 있다. 주거권의 전설, 주거권의 영웅이라는 호칭이 이런 연구물들의 제목으로 쓰이고 있다.

남아공은 역사적으로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분리정책) 하에서 잔인한 철거를 자행한 것으로 유명했다.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를 물리친 후, 남아공에선 “모든 사람에게 주거를”이란 강령을 내걸고 주거권을 새겨 넣은 헌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그루트붐이었다. 그루트붐을 비롯한 4천명 명의 주민들은 공설운동장 윌러스덴의 끔찍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침수된 땅이었고, 수도도 하수구도 부족했고 쓰레기 수거도 거부됐다. 전체가구의 5%만이 전기를 공급받았다. 주민 대부분은 아주 가난했고 1/4은 전혀 수입이 없었다. 이들은 비용이 저렴한 공공임대주택 단지에 입주하기 위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았지만 7년의 기다림에도 입주하지 못했다. 결국 390여명의 어른과 5백여 아동이 근처의 빈 사유지로 옮겨가 달동네를 이루고 살게 됐다. 그들은 이 마을을 뉴 러스트라 불렀는데, 그들 말로 “새로운 휴식처”란 뜻이었다. 이 마을로 옮긴지 3개월 후 땅 소유주는 퇴거명령서를 받아냈다. 갈 곳이 없다며 떠나기를 거부한 주민들에게 1999년 5월 18일 강제퇴거가 시행됐다. 이때는 남아공에선 막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뉴 러스트의 집들은 불도저로 밀리고 불태워지고 다른 소지품들도 파괴됐다. 주민들은 이전에 살던 공설운동장 근처로 가려 했으나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시당국에 호소했으나 이렇다 할 답을 듣지 못한 주민들은 집을 얻을 때까지 “기본적인 임시 주거”를 제공해줄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적절한 주거권에 대한 권리를 청구하려 시도한 것은 남아공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등법원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시의회 등에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적합한 주거를 제공할 수 있을 때까지 최소한의 거주를 구성할 수 있는 텐트와 화장실, 정기적으로 공급되는 물을 즉각 제공할 것을 명령했다. 정부는 항소했고, 결국 이 사건은 헌법재판소에서 크게 다뤄지게 됐다.

2000년, 헌법재판소는 “거처가 없는 사람에게는 우리 사회의 토대적 가치인 인간의 존엄, 자유, 평등 같은 가치가 거부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원칙적으로 주거권을 인정하는 결정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판결이 신청자들에게 즉각 주거 시설을 제공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채울 내용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그루트붐 자신은 약속 이행을 기다리기에 지쳤다며 움막에서 죽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얻어낸 판결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 “모든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는 걸 두려워하지요. 우리는 가난했고 살 곳을 원했기에, 나는 전진하는 걸 선택했어요.”라는 게 그루트붐 판결에 대한 그녀의 소회였다.

그루트붐 사건에 함께했던 인권단체들은 주거권의 현실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그루트붐 사망 이후 그녀를 추모하는 연속 강좌를 열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오늘 읽어볼 제프 버들렌더의 강연이다. 제프 버들렌더(Geoff Budlender)는 그루트붐 사건당시 주장요지(http://www.escr-net.org/caselaw/caselaw_show.htm?doc_id=401409)를 썼던 인권변호사이다.

1990년대 주거권이란 말이 한국 사회에서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을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 있었다. ‘세계주거권회의’에서 한국을 남아공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비인간적으로 철거를 하는 국가로 지목했다는 거였다. 아파르트헤이트 치하의 남아공의 행태와 비교됐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비교도 그보다 덜 수치스럽지는 않다. 그루트붐 판결과 용산판결의 비교….

용산참사에서 살아남은 철거민들은 감옥에 있다. 하나같이 중형선고다. 참사이후 함께 했던 인권활동가에게도 재판 결과 어떤 선고가 떨어질지 모른다. 선고재판이 몇 차례 연기되는 사이 또 구속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만 깊어가고 있다. 약자의 주거권 보장을 위한 법원의 역할을 기대하는 버들렌더의 연설문을 읽어보면서, 이정도 바람은 아닐지라도 살인진압의 지휘자는 한 번도 서지 않은 법정에서 철거민들만 중형을 때려 맞는 상황만이라도 벗어나길 바라는 게 지나친 바램일까.

그루트붐 추모 강연; 법원, 책임성과 참여 민주주의(제프 버들렌더, 2010년 10월)

아이린 그루트붐은 헌법재판소에 사회경제적 권리사건을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제기했습니다. 이 사건은 사법부를 시험했습니다. 우리는 사회경제적 권리를 의도적으로 포함한 헌법을 채택했습니다. 완전한 민주주의는 투표권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기에 그랬습니다. 그것은 또한 사회정의를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존엄한 삶을 영위하도록 하고 인간으로서의 잠재성을 성취할 수 있게끔 하는 생활의 기본적인 필수품에 대한 접근의 형태로 말입니다.

아주 분명하게, 법원의 첫째 할 일은 헌법과 헌법이 품고 있는 권리를 이행하는 것입니다. 집이 파괴당한 사람, 합법적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무데도 없는 사람은 생활의 가장 근본적인 필수품 중의 하나를 부인당한 것입니다. 법원은 이런 일에 대해 팔짱을 낀 채 다만 불운일 뿐이고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의 결과이고 언젠가는 변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법원이 뭔가를 해야 하느냐 마느냐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법원이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판사들은 흔히 이런 일이 어렵다는 걸압니다. 그들은 지적합니다. 사람들의 필요와 권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일이 대규모로 발생할 때, 대답해야 할 문제들 중 하나는 “누가 먼저냐?”라고 합니다. 동시에 모든 사람을 충족시킬 수 없다면 누구의 필요가 우선순위를 누려야만 하느냐? 그리고 또 “돈이 얼마나 드냐?”는 질문이 있습니다. 적절한 주거 또는 교육에 대한 권리가 문제라면, 어떤 정도 질의 주거 또는 교육이 헌법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제공돼야만 하는가? 누군가에게 더 많이 주는 것이 다른 이에게 덜 주는 것을 의미한다면 어떻게 그걸 판단할 수 있는가?

그루트붐 사건은 이런 것들이 우선적인 질문이 아니란 걸 보여줬습니다. 첫째 질문은 헌법적 권리에 대한 침해가 있었느냐 입니다. 침해가 있었다면, 법원의 첫째 의무는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그 자체로 중요합니다. 그럼으로써 청구자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정부의 실패를 드러내고, 우리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교육합니다.

법원은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긴급 구제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은 정부의 실패가 헌법 위반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헌법은 정부의 주거 프로그램이 합당해야만 할 것을 요구합니다. 집 없는 누군가가 집 없는 채로 제대로 된 집이 제공될 때까지 20여년 기다려야만 한다면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법원이 이런 선언을 했어도 질문은 남아있습니다. “누가 먼저냐?” 그리고 “돈이 얼마나 드냐?” 이런 질문에 직면한 법원은 대개 두 가지의 답변을 내놓습니다.

첫째, 법원은 그런 질문에 대답할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법정 앞에 선 유일한 사람들은 청구자와 정부입니다. 다른 집 없는 사람들에게도 요구는 있지만 그들은 법정에 있지 않고 자신들의 사실과 요구를 법원에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판사들은 사건에서 자신들 앞에 제출된 정보에만 제한돼 있고 다른 정보원에는 의존할 수가 없습니다. 판사들은 주택정책을 만들 기술이 없습니다. 판사들은 실제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게 뭔지,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지를 모릅니다.

둘째 답변은 그런 질문에 대한 결정은 그 결정에 대해 민주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져야만 한다는 겁니다. 아무도 판사에게 투표하지 않고, 잘못된 결정을 한 판사가 투표로 밀려나지도 않습니다. 흔히들 이런 결정은 민주적으로 책임질만한 이들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답변들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들 답변 중 어느 것도 완전한 답변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그루트붐이 집을 받아야만 하는지, 트란스케이의 진흙탕 학교의 아이들이 제대로 된 학교건물을 받아야만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결코 선거 과정의 주제가 되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5년마다 두 번씩 투표하지만 그것은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투표입니다. 여당을 지지해서 찬성표를 던지지만, 긴급 주거에 대한 정책이나 학교에 대한 자원할당 정책에 대해서는 반대표를 던진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앞서 말한 결정들이 민주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과정에 해당한다고 말하는 것은 민주적 과정이란 걸 과장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간단한 질문을 자문해봐야 합니다. 언제 무주택자를 위한 긴급 주거의 제공에 반대해서 투표해봤습니까? 어떤 정당이 트란스케이의 아이들이 진흙탕 학교에서 계속 공부해야만 한다고 말한 적 있고, 어느 누가 그런 정책을 지지해서 투표했던가요?

이런 결정들에 대해 정부는 민주적으로 책임질 수 있다는 주장은 따라서 허구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세한 것에 대해 투표하지 않으며 결코 그렇게 할 기회를 가져본 적도 없습니다.
둘째로, 이런 결정들의 대부분은 선출된 공직자들에 의해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루트붐 사건의 경우, 정부는 긴급 주거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결코 한 적 없습니다. 단지 정책에 격차가 있었습니다. 주거 정책은 공무원들과 전문가들이 세우고, 아마도 시장이 승인합니다. 주거 정책은 결코 민주적으로 책임질만한 심의 기구에서 고려돼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학교 건물에 어떤 예산을 할당할지에 대한 결정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에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결정은 사무실에 앉아있는 공무원들과 고위 정치인들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그들은 자원을 할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닫힌 문 뒤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합니다. 그들은 대개 자신들의 결정에 대해 공적으로 책임질 필요가 없습니다.

판사들은 공공연히 국민 앞에 앉아있습니다. 판사들은 주장에 귀 기울여야만 하고 결정에 대한 근거를 대야만 합니다. 이것은 강력한 형태의 책임성입니다. 저는 현직 판사로도 있어봤고 정부 공무원으로도 일 해봤습니다. 판사로서 느꼈던 책임성의 압박감이 정부 부처의 수장으로서 취할 수 있었던 대부분의 결정보다도 훨씬 더 컸다는 것을 저는 진심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판사들의 비책임성에 대한 주장은 귀담아듣지 말아야 합니다. 판사들이 선출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을 하는 많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직접적인 책임성을 가졌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원할당을 놓고 경쟁하는 주장들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판사의 능력에 대한 질문은 유효합니다. 저는 분명히 판사들이 운영하는 국가에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권리의 침해를 발견했을 때 판사들은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판사들이 상세한 권리구제를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거나 적절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열쇠는 책임성을 증진하는 것입니다. 권력 행사에 대한 책임성의 원칙이 우리 헌법의 근본입니다.

일단 권리 침해를 발견했다면 법원이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은 정부로 하여금 침해를 구제하기 위해 무엇을 해왔고, 장차 무엇을 할 것이며, 언제 그 일을 할 것인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도록 명령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대중적으로 정부의 책임성을 물을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집니다. 정부의 프로그램이 부적절하면, 대중적인 토론과 캠페인, 조직화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이런 일들이 정부로 하여금 더 잘하도록 질책합니다. 국민들에게는 자신들의 공적인 대표들에게 책임성을 물을 수 있는 정보가 주어집니다.

정부가 장차 뭘 할 것이라고 말하면, 그것에 반하는 정부 행위가 검증될 수 있는 기준이 만들어집니다. 정부가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실패를 정당화할 수 없다면, 법정에 재소환될 수 있거나 또는 여론의 법정에서 정부행위의 정당성을 입증해야만 할 겁니다. 또다시 참여와 민주주의는 깊어집니다.

법원이 할 수 있는 두 번째 일은 정부의 계획, 그 계획들의 이행여부에 관해서, 그것들이 헌법적 기준을 충족시키는 지를 법원이 판단할 수 있도록 법원에 보고하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때로 구조적 금지명령(structural interdict)으로 일컬어집니다. 정부에게는 권리의 효력을 발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여지가 주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부가 하기로 결정한 것이 헌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는가를 결정할 것을 법원에 묻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법원은 법원의 능력을 벗어난 문제를 결정할 것을 피하면서도, 되어진 일이 사실상 헌법의 기준을 충족시키는가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법원이 할 수 있는 세 번째 일은 “현장에서” 참여와 책임성을 증진시키는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헌법재판소는 사람들의 퇴거를 원하는 지자체는 퇴거 절차를 진행하기 전에 주민들과 “의미 있는 약속”을 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올리비아 로드(Olivia Road) 사건은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줬습니다. 이 사건에서, 요하네스버그 시내의 수백 명이 정말 끔찍한 사유 건물에 살고 있었습니다. 건물은 위험했죠. 화재위험이 아주 컸고 심각한 건강 위해요인이 있었습니다.

시당국은 사람들을 퇴거시키도록 법원에 청구했습니다. 주민들은 나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적은 돈벌이라도 하려면 시내에 살아야만 하고 갈 곳이 아무데도 없으니, 굶어죽을 도시 외곽으로 내쳐지느니 차라리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살던 건물에 머물겠다고 했습니다.

법원은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끔찍한 고통과 고난을 야기할 줄 알면서도 퇴거를 명해야 할까 아니면 그 역시도 큰 고통을 야기할 줄 알면서도 살던데 그냥 살도록 허용해야 했을까요?

법원은 둘 다 하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양 당사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대하여 쌍방이 “의미 있는 약속”을 할 것을 우선 명령했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시당국은 거주자들을 동등한 자격으로 다뤄야만 했습니다. 쌍방은 그들이 법원에 되돌아가야만 하고 스스로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쌍방은 자신들이 부당하게 행동한다면, 법원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명령을 할 것이란 위험을 알았습니다. 모든 권력을 가진 시당국과 무력한 거주자들 간에 놓인 예전의 불평등성이 갑자기 변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시 당국은 화재 위험과 건강 위해성을 제한할 수 있는 몇 가지 응급 보수를 건물에 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일단 건물 보수를 한 후에, 시에서 거주자들이 이주할 수 있는 다른 건물을 찾았습니다. 거주자들은 이주에 합의했습니다. 거주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임대료를 지불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분명히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 해결됐습니다.

법원이 한 일은 민주적 책임성을 증진시킨 것이었습니다. 법원의 결정은 시 당국으로 하여금 시의 조처에 대해 거주자들에게 책임을 지게 만들었고 정당화하고 설명하게 했습니다. 필요하다면 법원에도 그것을 정당화하고 설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거주자들을 정부의 관대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아니라, 권리를 가졌기 때문에 정부와 협상할 위치에 있는 권리 소유자로 변화시켰습니다. 물론, 이것이야말로 권리의 목적입니다. 권리는 권력관계를 바꾸고 다스립니다.

우리의 최종 헌법을 채택한 후 14년, 깊은 불평등과 빈곤이 사회정의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건설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조롱해왔습니다. 헌법재판소는 민주적 참여, 권력의 책임성을 증진시킴으로써 우리의 최상의 목적을 성취하는데 법원이 도울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