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권, 그 중에서도 주거권
주거권은 흔히 사회권의 한 영역으로 다루어진다. 인권을 자유권과 사회권으로 구분하는 것은 사회권을 부정하거나 홀대하는 현실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인권운동은 끊임없이 사회권을 특히 더 강조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 보니 ‘사회권도 인권’이라는 추상적 담론을 사회화시키는 데에 힘을 써야 했고, 인권의 실현을 위해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이 필요한지 충분히 제안하지 못했다. 물론 취약한 사회권 보장의 현실 때문에 비인간적인 조건을 강요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싸우며 사회권의 의미를 구체화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그것을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의제화 하려는 노력도 진행됐다. 하지만 사회권의 실현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정책들은 층위나 분야가 매우 다양할 뿐만 아니라 꽤 전문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 어떤 수준에서 인권적 접근을 시도해야 할지 명쾌하지 않았다. 또한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라는 인권의 근원적인 요청은 여러 정책을 통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달성되기 어렵다. 뒤집어 말하면 개별적인 정책에 대한 접근으로는 사회권 보장을 위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사회권으로 분류되는 영역의 권리들이 유사하게 부딪치는 쟁점들 외에 각각의 영역별로 가지게 되는 고유한 어려움이 있다. 거기에는 해당 권리가 주요하게 다루는 내용의 성격에 따른 것도 있고 한 사회가 놓인 역사적, 구조적 맥락에 따른 것도 있다. 사회보장(대체로 소득보장), 의료, 교육, 주거는 복지국가의 네 기둥이라고 일컬어진다. 물론 한 국가 안에서도 각 영역별 정책 기조는 예상과 달리 일관되지 않으며 특정 분야의 정책이 하나의 권리에 대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회권의 실현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영역들임은 분명하며 이 영역들을 비교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정책 영역으로 보면, 주거권 실현을 위해 불가피하게 주택이라는 재화가 필수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주택은 다른 재화나 서비스보다 매우 비싸다. 생산하는 데에 거대한 비용이 투여되어야 한다는 점은 국가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에 여러모로 제약 요건이 되었고, 그만큼 주택은 전 세계적으로 시장의존도가 높다. 다른 재화나 서비스에 비해 상품성 또는 재산으로서의 성격이 가장 강하다. 한국에서도 주거와 관련된 정책들은 건설경기 부양이나 부동산 시장 관리와 같이 경제정책으로 다루어졌다. 사회적으로 쟁점이 될 때에도 이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에는 뉴타운으로 대표되는 개발 문제가 새로운 질문들을 던지며 정치적 쟁점이 되었지만 이 문제 역시 주거권의 관점에서 제기되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전세계적 부동산 경기 하락으로 인해 개발이익이 충분히 발생하기 어려운 조건이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고 용산참사는 국가폭력의 잔인함과 동시에 주거권을 환기시켰으나 주거권 패러다임의 부재는 여전히 한국사회에 남은 과제다.
땅 위를 맴도는 주거권의 역사
인권은 이론적 근거에서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것이기 보다 인간다운 삶을 향해 저항해온 역사를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건강, 교육, 소득보장에 대한 권리들과 비교하면 주거권에 대한 인식이 가장 미약하다. 외환위기로 급속히 증가한 실업 문제를 배경으로 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된 것은 시혜에서 권리로의 전환을 대표하는 것으로 대개가 인정한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시작된 한계에도 불구하고 건강보험은 권리에 대한 학습효과를 낳았고 의료와 관련된 정책들은 사회적으로 주요 쟁점이 되어 왔다. 교육 역시 마찬가지다. 무상의무교육이라는 분명한 정책과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지위 등은 교육 문제를 권리화하는 담론의 배경이 되었다. 물론 여러 맥락에서 여러 내용으로 등장하는 ‘권리’ 주장이 늘 사회권으로 이해될 수는 없으며 ‘권리’ 담론이 권리의식으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주거권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주거권은 여전히 설득력이나 호소력이 충분하지 않고, 그래서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나 정책 목표로 잘 등장하지 않는다.
돌아보면 한국사회에 주거권의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다. 1920년대 초에는 복지국가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사회주택조합 또는 협회와 유사한 주택구제회, 주택조합 등이 결성되었다. 조선인 자본가 계층이 주도했고 주거문제를 처음 제기했다는 점에서도 외국의 경험과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일제는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주거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 공공주택에 해당하는 부영주택을 건설했으나 주택 건설을 위해 원래 살던 도시빈민들을 강제퇴거시키는 등 한국의 개발독재정권과 다르지 않은 대응을 보였다. 1930년대 들어서는 자본가 계층이 운동에서 멀어지면서 차가인, 즉 세입자들이 주거권 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차가인동맹을 조직하거나 철거반대투쟁을 하면서 임대료(집세) 인하, 차가법 제정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에는 안정적인 점유기간이 전혀 보장되지 않아, 1년 동안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한국전쟁 이후 반공독재정권이 수립되어 유지되는 동안 거의 잊혀졌다.
독재정권이 막바지를 힘겹게 달리던 1989년에는 전세값이 역대 최고(현재까지도)로 폭등하면서 잇단 자살이 주거권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드러냈다. 이들을 추도하는 합동추도식도 열렸고, ‘철마다 쫓겨나는 세입자 신세’, ‘엄마, 또 이사 가?’, ‘폭등! 전세값 더 이상은 갈 데 없다’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소형 임대주택 공급 등을 요구하는 집회도 당시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주택임대차보호기간이 1년에서 2년으로 연장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이 시기 이후 20년 동안 세입자의 주거권 주장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주거와 관련된 진보 개혁 성향의 요구는 분양가상한제와 공공임대주택 확대로 수렴되었다. 노태우 정권이 자가 소유 촉진 기조를 지키면서 시혜적 차원에서 영구임대주택 공급을 약속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접근이었다. 영구임대주택이 주거권 혹은 주거복지의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는 첫 정책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나, 시간이 흐르며 사회적 분리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은 시민사회가 그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발전시키지 못한 데에도 책임이 있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주거권 하면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올리는 철거민 투쟁을 빼놓을 수 없다. 철거민 투쟁은 민중운동의 역사에서도 굵직한 줄기를 이어왔다. 철거민들이 처한 현실은, 소유권 없이는 점유권을 주장할 길이 전혀 없는 세입자의 보편적 현실을 반영한다. 그 중에서도 강제퇴거는 중대한 인권침해로서, 강제퇴거로부터의 보호는 국제인권규범에서 국가의 최소핵심의무로 명시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책 없는 강제철거 반대한다’라는 철거민들의 절절한 호소는 보편적인 주거권을 확장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개발독재정권의 폭압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물리적으로 재개발의 필요성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철거민들의 주장은 근본적인 해결에 이르지 못하는 임시 대책들로 포획되어 버리고 인권을 외치는 그/녀들의 열망은 인권의 언어를 얻지 못한 채 흩어져갔다. 철거민 투쟁에서 인권이라는 말은 용역깡패나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는 데에 사용되었고 비자발적으로 쫓겨나는 것 자체가 인권의 문제라는 사회적 인식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것은 최근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개발 사업에서 대표적인 세입자 대책이라고 할 수 있는 임대주택 입주권은 개발이익의 일부를 사회화하는 차원에서 임대주택 건립을 의무화하는 것일 뿐, 누가 들어가서 살 수 있는지는 책임지지 않는 정책이었다. 재정착은 거주민의 권리로 확립되지 못했고, 그에 앞서 누구도 비자발적인 퇴거를 강요당해서는 안 되며 국가는 모든 사람을 강제퇴거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은 여전히 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다.
주거권의 정치가 필요하다
위와 같이 주거권이 권리로 인식되기 어려운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주거권이 기본적 인권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세계인권선언을 제정하던 당시에도 권리라는 점 자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었던 것을 여기에서 다시 힘주어 강조하지 않겠다. 문제는 종잇장 위에 잠들어 있는 주거권을 어떻게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불러낼 것이냐다. 이를 위해서는 주거권의 내용을 명확히 밝히고 주거권의 관점에서 주거 관련 정책들을 꿰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권리는 정책이나 제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정책이나 제도를 통해 권리를 향한 힘을 모아내고 터뜨릴 수 있다. 그것이 주거권의 정치일 것이다. 주거권은 여러 가지 요소를 통해 설명되는데 주거정책에서 특히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주거의 수준, 점유의 안정성, 주거비 부담, 그리고 비차별의 원칙이다.
주거권은 주택에 대한 권리로 환원될 수 없지만 적절한 주거 환경의 확보는 주거권의 핵심적 요소 중 하나다. 한국의 최저주거기준은 면적과 방실의 개수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세계보건기구가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으로 주택을 지목했듯 여러 측면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채광이나 통풍, 환기뿐만 아니라 에너지의 공급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주거환경이 열악한 주택에서 살아가게 된다. 고시원이나 쪽방은 평당 임대료가 타워팰리스보다 높은 수준이지만 보증금이 없다는 조건 때문에 사람들이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최저주거기준 미달 가구 중 자가 거주 가구가 적지 않다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 결국 이 문제는 모든 사람의 주거권을 실현하기 위해 적절한 질의 주택이라는 사회적 자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또한 적어도 어느 수준까지를 국가가 책임질 것인지를 밝히는 문제다. 주택보급률이 일정한 수준을 넘었고, 과거와 같이 대규모 정비사업을 통해 주거환경 개선을 시도하는 것이 정당화되기 어려운 현실(과거의 재개발 사업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에서 기존 주택들의 주거환경을 어떻게 개선할 것이며, 주거환경의 개선 효과가 누구에게 우선적으로 돌아가도록 할 것인지 드러내야 한다. 19대 총선 공약에서 대부분의 정당들은 뉴타운 재개발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지만 저소득층 거주민들을 중심에 놓고 주거재생을 꾀하는 접근은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 정도에서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어느 정당도 인간다운 삶을 뒷받침할 수 있는 주거의 수준이 어느 정도이며 그 수준에 미달하는 주택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를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거권의 관점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점유의 안정성은 집을 소유하지 못했거나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하지 못한 사람들, 즉 민간임대시장에서 주택을 구해야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다. 물론 소득분위별로 편차가 있다. 한국은 임대차보호가 취약하기 때문에 집주인이 임대료를 올리라고 할 때, 소득이 낮은 사람들은 이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가난할수록 이사도 더 많이 다녀야 하는 것이다. 주거권을 보편적인 권리로 인식한다는 것은 그/녀가 어떤 집에 살고 있든 삶을 충분히 펼쳐놓을 수 있는, 개인의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간이 보장되어야 함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몇 년을 보장할 것이냐 어떤 방식으로 보장할 것이냐의 제도적 접근 이전에 이 점이 확인되어야 한다. 누구나 살고 싶은 만큼 한 집에 머무를 수 있도록 국가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보호해야 한다. 특히 한국적 임대차제도인 전세제도의 광범위함 때문에 보증금을 돌려받을 권리를 중심으로 임대차관계에 접근하고 있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재산보다 주거의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이번 총선공약에서 제시된 민간임대주택의 등록제와 임대차계약 갱신우선권 역시 이런 방향을 향해 가는 과정으로 자리매김 될 때에만 주거권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강제퇴거금지법 제정 등 강제퇴거로부터의 보호도 중요한데, 이것은 주거비 부담 문제로도 이어진다. 주거비를 부담할 형편이 안 돼 비자발적으로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임대료를 보조하든, 임대료 인상을 규제하든, 경매를 제한하든 거주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는 분명하다.
주거비 부담은 모든 정당이, 또한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소리 높여 말하는 주제다. 그러나 주거비 부담은 소득과 비교해 주거비가 얼마나 지출되는지의 문제로, 다른 부문의 정책 역할이 크다. 또한 이미 부풀대로 부푼 부동산시장에서 가격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점에서 신중해야 한다. 한편 주거비 부담은, 임대료의 문제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주택담보대출이나 전세자금대출의 이자 또는 상환금의 형태로 존재하기도 한다. 각각의 경우에서 지불되는 비용의 성격이나 그것의 최종 소유자는 달라진다. 그래서 임대료에 대한 규제(공정임대료 산정, 전월세 상한제 등), 임대료 보조제도뿐만 아니라 주택금융제도 개선 등 다양한 접근이 필수적이다. 전세가 점차 줄어들고 있고 월세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시장의 조건도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누구도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것을 위협하는 정도로 주거비 부담에 짓눌려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출발점이자 최종 목표로 놓는 것이다. 소득이 없거나 적어서, 물려받은 재산이 없어서,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주거환경을 강요당하거나, 그 곳에서조차 떠나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돈을 셈하고 또 셈하며 발품을 팔 때마다 절망을 확인해야 하는 현실을, ‘인간의 존엄’에 대한 문제로, 인간을 모욕하는 사회의 문제로 바꾸어내는 것이 바로 주거권의 정치인 것이다.
이 모든 요소와 각각의 정책들은 언제나 비차별의 시선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 독거노인, 장애인, 비/미혼모, 이주민 등의 집단이 겪게 되는 임대거부 등의 직접차별을 금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사회 전반에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노력과 병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다양한 집단이 집단의 특성에 따라 처하게 되는 주거문제들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 장애인이 거주할 수 있는 편의시설을 갖춘 주택 자체가 부족하다는 점이나, 주택뿐만 아니라 주거생활을 해나가는 데 필요한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거나 하는 경우 그에 맞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한편, 접근성을 제한하는 요소들을 없애는 것 외에 주거취약계층에게 주택이나 급여 등 자원이 우선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이때 ‘홈리스’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홈리스는 누구에게도 기꺼운 호칭이 아닐 것이나 적절한 주거를 누리지 못하는 상태가 정의되어야 하고 각각의 경우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거리노숙뿐만 아니라 쪽방, 고시원 등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거주하는 상태, 친척이든 친구든 남의 집에 임시로 거주하는 불안정한 상태, 주거비 부담이 일정 수준을 넘어 기본 생활을 위협하는 상태 등이 그것이다. 많은 수의 청년들과 탈가정 청소년들 역시 이 범주를 통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
주거권의 정치를 위한 질문을 길어 올려야
주거권은 특정한 정책이나 제도 자체를 지시할 수 없다. 주거권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매우 다양하며 특정한 문제를 하나의 정책 효과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사회마다 그 사회가 자리한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정책이 주거권 실현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러 정책이나 제도가 주거권 실현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가 제시되어야 하며 구체적인 지표의 설정을 통해 평가될 수 있어야 한다. 각각의 정책이나 제도들은 물리적, 경제적 접근성이나 비차별 원칙 등을 통해 세부적으로 점검되어야 하며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 당연히 시장에 대한 개입은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실현가능성이라는 의문부호들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 국가가 없다는 것 또한 누구나 알고 있다. 또한 단번에 실현될 수 없다거나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 권리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도 분명하다.
사람이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그 사람이 인간다움을 누리고 만들어가는 역량을 구성한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어디에선가 살아가면서 살고 있는 동네나 집에 따라 만나게 되는 사람, 계획할 수 있는 인생, 얻을 수 있는 자원, 추구할 수 있는 욕망이 달라진다는 점을 안다. 또한 집이 모욕감과 서러움, 비참함, 절망을 강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점 역시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주거권이다. 쫓겨나는 철거민들의 모습에서 개발의 문제점만을 읽어서는 안 되며, 고시원에서 살기를 감행하는 청년들의 모습에서 고시원의 열악한 환경과 청년실업의 문제만 읽어서는 안 된다. 분양가상한제는 건설자본의 무분별한 이윤 추구를 막는 의미도 있었지만 분양을 꿈꾸기 어려웠던 사람들의 주거 문제를 비가시화하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하우스푸어들이 이자나 상환금의 형태로 사실상 월세를 내면서도 굳이 집을 사는 것을 선택해야 했던 상황을 근본적으로 봐야 한다. 주거권의 관점에서 누구를 어떤 맥락에서 주목할 것인지, 무엇을 문제 삼을 것인지 밝혀야 한다.
주거권이라는 말을 꺼내기 전부터 ‘재산권’이라는 말이 귓전을 울린다. 주거권의 정치를 위해서는 재산권을 우회할 수 없다. 사실 재산권은 인권과 뿌리가 같다. 그러나, 그래서 재산권은 모든 인권이 그러하듯이 오직 다른 인권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한국사회가 법으로 보호하고 있는 주택이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모두 인권으로 옹호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모든 사람이, 그리고 각자가 거주하기 위해 필요한 주택을 어느 정도까지 재산으로 보호할 것이며 어느 정도까지 소유를 제한할 것인지의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을 거주용으로 임대해서 소득을 얻는 집주인들이, 그래도 가난한 사람들이 살 곳을 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난감한 현실은 끝내야 한다. 대상이 무엇인지 불문하고 돈이 있는 만큼 차지하는 것을 승인하는 탐욕의 동맹도 끊어야 한다.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근간에 놓인 생산체계에서도 시선을 떼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가 소유의 욕망을 도덕적으로 문제 삼으면서 그 안에 숨은 주거권에 대한 열망까지 함께 폐기처분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가난할수록 내 집 마련의 꿈이 진실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 꿈들은 벗어나기보다는 조금씩 손보면서 살 수 있는 수준의 집에서, 다른 꿈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의 주거비 부담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오래도록 살고 싶은 꿈인 것이다. 한국사회는 지금껏 이런 집을 소유권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것으로 각인시켜왔다. 주거권은 이 꿈을 다른 방식으로 담아야 한다.
진보신당이나 통합진보당이 의미 있는 정책들을 제안했지만 개별 정책에 붙들려 주거권의 꿈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점은 매우 아쉽다 녹색당은 아예 주거정책이라 할 만한 것을 내지 못했다. 주거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땅이라는 모든 생명의 터전을 사람이 얼마나 어떻게 점유할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녹색당만이 제안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다려진다. 이런 아쉬움들은 사회권 현실이기도 하다. 한편에서는 권리임을 끊임없이 부정당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냥 추상적인 가치로 승인되는 데 그치고 만다. 그러나 주거권의 정치는 이미 시작되었다. 아직은 관중석에 있는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거기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주거정책만 보고 정당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주거정책을 보면 정당을 짐작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정당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주거 문제와 관련해 발언해 온 모든 운동 진영에 고스란히 되돌려야 할 평가다. 또한 정치가 정당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운동들이 주거권에 주목하는 것을 늦춰서는 안 될 이유다. 인권은 가장자리에서, 그리고 틈새에서 체제의 틀을 바꾸고 힘을 새롭게 배치할 질문들을 던지는 것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집에 살고 싶은 만큼 살면 안 돼? 왜 집주인이 내라는 대로 임대료를 내야 해? 나는 그만큼 낼 수 없는데? 돈이 없다고 우울한 반지하방에서 살아야 해? 부모가 집이 없으면 나도 집이 없는 채로 살아가야 해? …… 연말에 있을 대선에서는 질문이 던져지기를, 주거권의 정치가 펼쳐지기를 바란다.
덧붙임
미류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