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작년 12월 31일 기점으로 ‘낙태죄’는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세상은 크게 나아진 것이 없는 듯 하지만, 2021년 1월 1일 부인할 수 없는 변화는 시작됐다. 낙태죄가 사라졌다.
여전히 과제는 많다. 낙태죄는 죄가 될 수 없다는 헌재의 해석에 국가가 책임 있게 대처하지 않은 탓이다. 그 결과 우리는 처벌이 아닌 권리 보장을 위한 제도적 울타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낙태죄 없는 세계에 당도했다. 혹자는 그리 말할지 모르겠다. 국가가 손 놓고 있었던 덕분에 낙태죄가 없는 세계에 도착한 것 아니냐고. 아니다. 지금의 새로운 세계는 어부지리로 얻은 드문 행운이 아니다.
낙태에 관한 법 개정 시한을 고작 3개월 남겨놓고 내놓은 정부안은 형편없었다. 또 다시 국가는 여성의 몸에 대한 판단자 역할을 자처하며 임신중지가 죄가 되는 시점과 죄가 되지 않는 시점을 정하는, 처벌이 아닌 권리를 요구한 낙태죄 폐지 투쟁의 오랜 역사와 헌재가 말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다.
그 사이 모낙폐(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는 코로나19 확산으로 대중사업이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기자회견, 온라인 캠페인 등의 방식으로 성과 재생산 권리에 대해 알려냈다. 정부의 입법예고안이 발표될 즈음, 프로라이프 진영의 ‘낙태죄 폐지 반대’ 움직임이 활성화되기도 하였으나, ‘낳을 권리와 낳지 않을 권리’를 동시에 요구하는 모낙폐의 입장에 오히려 대중적 관심이 집중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또한 낙태죄 관련 법 개정에 대한 행정부안을 비판하는 문제의식을 알려내면서 모낙폐는 사회운동세력을 폭넓게 조직하였고, 낙태죄 비범죄화를 위해 무능한 정부와 무책임한 국회를 치열하게 설득했다. 그 과정에서 기자회견 사회를 맡은 공동집행위원장이 경찰의 인지수사를 받고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나 활동은 위축 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비로소 낙태죄(형법 269조1항, 270조1항)는 그 효력이 상실되어 실질적인 폐지에 이르렀다.
낙태죄가 사라진 2021년, 여전히 어떤 진영은 낙태죄 이후 법과 제도의 공백으로 인한 혼란을 주장하며 낙태죄를 되돌리려는 시도를 하고, 일부 의사들은 양심에 따른 의료인 진료거부권을 주장하고 있다. 당장 임신중지가 필요한 여성들에게 임신중지는 부르는 대로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그래서 임신중절이 여성의 존엄과 권리를 보장한다는 법의 선언이 무색한 상황을 맞닥뜨리고 있다.
모낙폐는 2020년 낙태죄 폐지를 열흘 앞두고 낙태죄가 사라진 세계에 열 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가장 시급하게는 국가가 유산유도제를 도입하여 국가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하고, 임신중지에 건강보험을 적용해야 한다. 나아가 임신중지에 관한 의료현장에 대한 실태 조사 및 의료인에 대한 교육훈련, 보건의료체계를 재정비, ‘낳을 권리’와 ‘낳지 않을 권리’를 위해 노동조건을 마련하고,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성교육, 출생, 양육, 입양 등 관련 법제도를 개선하여 임신중지로 인한 차별과 낙인을 해소해야 한다는 게 과제의 주요 내용이다. 죄가 없어진 자리에 채워 넣어야 할 것이 적지 않다. 2020년이 낙태죄 폐지의 해였다. 낙태죄가 사라진 자리에서 여성의 몸을 둘러싸고 존엄과 권리를 침해하는 모든 시도에 맞설 것이다. 2021년의 세상은 안전한 임신중지와 재생산 권리 보장되는 세계로 확장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