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며 시작한 국회 앞 농성이 두 달여 이어지고 있다. 첫날 경찰과 싸우며 비를 피할 비닐을 겨우 걸쳤던 농성장은 요새처럼 튼튼한 모양을 갖췄다. 농성장 안팎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끝에서 나온 퀼트와 가랜드와 깃발들이 화사하게 걸려있다. 다녀가는 사람들마다 농성장이 어쩜 이리 예쁘냐는 말을 한 마디씩 한다. 장식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농성장에서 이어진 시간이야말로 사랑과 우정이 자라는 ‘예쁜’ 시간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진심으로 이어온 농성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전국 163개 단체가 모인 연대기구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 소속되지 않은 단체들까지 포함해 ‘2021 차별금지법 연내제정 쟁취 농성단’이 구성돼 두 달의 시간을 함께 만들어왔다. 24시간의 농성장 지킴이를 서로 자원하여 맡으며 아침 점심 저녁으로 피켓을 들고 선전을 했다. 어떤 단체들은 낮 시간에 자체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하기도 했다. 천 조각을 이어붙여 퀼트를 만들고 색연필로 색을 칠해 엽서를 만들기도 했고,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 시간을 열기도 했다. 단체들이 한창 바쁠 때인 11, 12월에 기꺼이 시간을 내어 다채로운 활동을 이어가는 모습에 서로 감동하며 기운을 내는 시간이었다.
저녁 시간에는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매주 화요일에는 종교단체들이 ‘화(和)요기도회’를 주관해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 불교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바라는 기도를 올렸다. 수요일에는 서울인권영화제와 인천인권영화제가 ‘평등수크린’을 열어 평등의 감각을 키우는 영화 상영과 대화의 시간을 이어갔다. 목요일에는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이 ‘퀴요문화제’를 열어 성소수자혐오와 차별의 현실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퀴어의 사랑과 용기를 키웠다. 금요일에는 농성단에서 ‘평등불금 문화제’를 진행했다. 차별금지법과 함께 우리가 만들고 싶은 변화를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 발언들이 이어졌고, 12월 31일에는 송년문화제를 열어 한해를 돌아보기도 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실패한 국회와 정부
6월 10만행동과 10월 백만 보의 평등길로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가 쌓이는 동안 국회는 43초의 시간을 썼다. 국민동의청원 심사를 21대 국회 회기말까지 연장한다는 결정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고 분노는 농성에 오히려 활기를 불어넣었다. 농성이 이어지자 정치인들도 차별금지법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한참 부족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말이 되어서야 ‘반드시 넘어서야 할 과제’임을 인정했지만, 제정을 위해 정부는 무엇을 할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은 논의를 시작하겠다며 토론회를 열었으나 반동성애 세력의 주요 인사들을 불러 앉혔다. 여당 주최의 토론회에서 동성애 전환치료가 주장되고 에이즈 가짜뉴스가 전파되었다. 눈치보기만 문제가 아니라 평등의 기본 원칙을 모르는 게 문제라는 점이 확인되었다. 국회와 정부는 아직 평등으로 도약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거대 양당의 대선 후보들도 마찬가지다. 이재명 후보는 ‘성소수자에게 사과하라’는 한 청년의 호소에 “다했죠?”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샀다. 이 후보는 ‘유권자를 대하는 태도’의 부족함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문제는 ‘주권자로부터 성소수자를 배제해온 역사’에 대한 인식과 성찰이 없다는 데 있다. 윤석열 후보는 차별금지법이 자유를 침해할 것이라며 길을 막고 있다. 윤 후보의 다른 말들에 비춰보면 그가 지키고 싶은 자유는 노동자 차별할 기업의 자유, 디지털 성착취물 볼 남성의 자유일 뿐이다.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만들자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신아 님은 농성 후기에 이렇게 썼다. “어느때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함께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올해가 차별금지법 없이 끝나갑니다. 그러나 차별금지법 제정이 한국 사회에 없는 것은 국회와 정부의 실패이지 우리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차별금지법 만들라는 요구를 넘어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를 만들자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는 차별금지법 제정의 의미를 넘어선다. 사회의 기본 가치로 평등을 선언하고 평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나라, 서로의 존엄을 인정하며 동료 되는 역량을 키울 수 있는 나라, 먹이고 살리고 먹고 사는 모두의 내일을 함께 만드는 나라...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농성단은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만들기 유세단’으로 전환하는 결정을 했다.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인 국회를 우리만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떠나지 않고 지킨 ‘성’에서 이어진 용기와 연대의 힘을 기억하기에 스스로 부수고 떠나는 결정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농성단은 알을 깨고 다시 한 걸음 내딛기로 했다. 차별금지법과 함께 우리가 세상을 바꾸자는 이야기를 건네러 동네 골목과 시장과 거리를 구석구석 다니기로 했다.
유권자가 아닌 주권자로서
“여자가 이런 일 할 수 있겠어?” “나이 드셨는데 일을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죠.” “국민연금 가입기간을 채우지 못해서 연금 수령이 어렵습니다.” “여기는 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 없어요.” “5인 미만 사업장이라 근로기준법 적용이 안 됩니다.” “등록된 가족관계가 아니라 피부양자가 될 수 없어요.” 정치인들이 떠들어대는 ‘민생’은 어떤 ‘민’의 어떤 ‘생’에 붙는 말일까. 차별을 그대로 두고도 불평등을 시정할 수 있다는 거대한 착각을 깨는 것은 점점 시급한 일이 되고 있다.
차별금지법 만들려니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까지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어쩌다 '소수자'는 이런 사명까지 떠안게 됐나. 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하라는 요구가 차별 피해를 구제할 제도를 만들어달라는 데 그치지 않는 건 자연스럽기도 하다. 차별받는 사람들일수록 혼자 평등해질 수 없고 혼자 먹고살 수 없다는 걸 몸으로 익히게 되기 때문이다. 유세단은 마치 외계에 있는 듯 취급되는 ‘소수자’가 오늘 우리 안에 함께 있으며 내일을 함께 여는 동료시민이며 바로 ‘우리’임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유권자가 아니라 주권자로서 내일을 만든다. 차별을 깨고 내 삶의 자유를! 차별에 맞서 평등한 존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