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30주년의 슬로건은 ‘기꺼이 엮인 우리’였습니다. 서로의 엮음과 엮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행사하던 날, 구조물을 세워서 참여형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요. 당시엔 기꺼이 엮여 주시는 마음으로 구조물을 만들어주신 줄 알았는데 그때 빚을 잊지 말라는 분이 계십니다.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남어진 님을 만났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밀양에서 11년째 살고 있고, 송전탑반대운동을 하러 왔다가 밀양 주민이 된 남어진입니다. 지금은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목수도 하고 있습니다.
송전탑반대운동 하러 왔다가 밀양의 주민이 되셨다면 원래 밀양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지내셨던 것일까요?
원래는 군위에서 살던 청소년이었는데요, 뉴스를 통해 밀양 투쟁을 알게 되었죠. 전기를 사용하기만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할매들이 송전탑을 반대하면서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니까 책임감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일단 밀양으로 출발했어요. 그렇게 무작정 밀양으로 출발했어요. 연대자들을 ‘너른마당’이라는 곳으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진짜 그냥 마당인 줄 알았던 거예요. 전기를 최대한 안 쓰려고 휴대폰도 일부러 집에 두고 몸만 챙겨서 그 ‘마당’이라는 곳을 찾아가기 위해 헤맸던 기억이 있어요. 너른마당이 밀양 시내에 있는 활동 공간의 이름인 줄 모르고요.
밀양에 도착해서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2013년 10월에 밀양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바드리 마을로 출발했어요. 당시 고등학생이던 제가 마주한 현장은 송전탑 건설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힘이 센 젊은 경찰과 한전 직원들이 주민들과 시민들을 억지로 밀어내는 상황이었는데요. 근데 그때는 제가 활동가도 아니고 맡은 역할이 없으니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더라고요. 쓰레기 줍고, 식사 나르는 그런 허드렛일을 하면서 한 달을 넘게 보냈어요.
그러다가 12월 초에 유한숙 어르신이 뒤늦게 송전탑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셨죠. 어르신 분향소를 밀양 시내에 만들었어요. 학교 관계자가 이렇게 지낼 거면 학교를 그만두거나 아니면 접고 돌아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투쟁하다가 경찰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학교 이름이 보도될까 부담스러웠던 거였겠죠. 결국, 분향소 투쟁하면서 학교를 정리했어요.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 시기가 되니까 친구들이 명예 졸업장을 만들어주긴 했어요(웃음)
그 이후에 본격적으로 밀양에서 송전탑 반대 활동가로서 지냈어요. 봄을 앞두고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한 농성장을 차리면서 101번 송전탑 자리를 제가 담당하게 되었죠. 2014년 6월 11일 행정대집행 전까지 정말 샐 수 없이 오르내렸어요. 마지막에는 연대하러 오신 분들 농성장으로 안내하려고 하룻밤 사이에 5~6번은 올랐어요. 아시다시피 송전탑은 들어섰고, 재판 대응을 해야 했죠. 383명이 입건되고 재판도 수십 차례 하면서 벌금이 쌓이니까 그 돈을 모으는 활동을 하고 다녔죠. 이후에 시험 송전할 때는 중단하라고 움막치고 3개월 지내기도 했고, ‘이렇게 밀양만 싸워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송전탑반대네트워크>를 만들어보려고 애도 썼어요. 2015년도에는 영덕으로 파견도 가서 주민들과 함께 자체 주민투표를 조직했어요. 영덕에서 1만 명 가깝게 반대하는 의견을 모아냈고, 그 힘으로 신규 핵발전소를 막아내는 데 힘을 보탰죠.
이후 문재인 정부 들어섰지만 결국 신고리 5, 6호기를 막지는 못했어요. 밀양의 초고압 송전탑은 신고리 5, 6호기에서 생산하는 전기를 수도권으로 나르기 위한 송전탑이거든요. 문재인 정부가 탈핵하겠다고 하길래 우리 이야기도 할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핵발전소 백지화가 아니라 공론화 위원회를 만들더라고요. 그리고 초고압 송전탑 아래 사는 당사자로서 밀양의 의견은 하나도 듣지 않더라고요. 공론화 위원회 바깥에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공론화 위원회에서 신고리 5, 6호기 건설 결정이 내려졌고 밀양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어요. 동력도 많이 잃었던 거 같아요. 이제 더 이상 저 초고압 송전탑을 돌이킬 여지가 없어졌으니까요. 저도 미루어두었던 군 문제를 해결하러 가면서 활동가로서 삶과는 조금 거리를 두게 되었죠.
정말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셨네요. 그런데 어진 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중간에 밀양을 떠날 법도 했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밀양에 살고 계세요?
사실 제가 뭘 그만두는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식구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밀양 활동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냥 활동이기만 한 게 아니라 밀양에서의 일상이기도 했거든요. 할매들이랑 투쟁하러 가는 길이면서 동시에 방방곡곡 다니면서 도시락 준비해서 까먹는 시간이기도 한 거죠. 이런 일상을 그만두는 방법은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투쟁하고 그 성과가 없으니 떠나는 선택지를 떠올리기보다는 마주한 일상을 보내면 다음 일을 계속해나가는 시간을 보냈던 거 같아요. 군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는 밀양에서 만났던 인연들 덕에 목수가 되어서 송전탑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 생계 활동도 이어가고 있고요.
최근 밀양에서 다시 집회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는데 소개 부탁드립니다.
투쟁이 일단락되고 점점 할머니들의 손발이 되어서 동네 반장처럼 지냈었거든요. 지난 투쟁 돌아보면 괴로움도 있지만, 자부심도 함께 느끼며 밀양 싸움이 소멸하는 과정을 함께 겪어낸다는 마음으로 밀양 사람 남어진으로 살아가는 중이었는데요. 윤석열 정부에서 기후위기에 대응하겠다면서 핵발전소를 추가로 짓겠다고 하더라고요. 문재인 때는 이미 짓던 핵발전소를 끝까지 완성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지금은 새로운 원전을 추가로 짓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죠. 사실 한국전력이 발전소를 짓는 방식은 발전소를 먼저 짓고, 송전선로가 모자란다고 하면서 또 송전선로를 추가하는 거예요. 그럼 다시 송전선로 용량이 남으니까 발전소를 추가로 짓겠다는 식이거든요. 이 반복의 과정이 밀양에서 투쟁했던 사람들에게는 두 번 상처를 내는 일이에요.
이미 지난 10년 동안 밀양 곳곳의 마을은 공동체가 다 파괴되었거든요. 한전이 마을과 합의를 만들지 않고 송전탑을 짓기 위해 보상금을 마을에 뿌려버렸고, 찬성하는 주민들이 먼저 마을 몫을 다 받아가면서 송전탑을 반대 주민들의 몫은 남지 않게 되었어요. 단순히 주민 간의 찬-반의 의견 차이가 아니라 정부와 한전이 이런 갈등의 과정을 조장해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는 또다시 핵발전소를 짓고 비슷한 행태를 반복하겠다고 하니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윤석열 정부의 핵 폭주를 막아내기 위해 집회를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10년 전 6월 송전탑에 반대하는 할매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던 행정대집행을 상기하며 다시 한번 싸움을 이어가려 하니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6월 8일 전국에서 다시 밀양 희망버스에 탑승해 주세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이어가볼까 하는데요, 목수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병역 문제를 해결하고 생계가 막히면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는 목수가 되었거든요. 택배 까대기, 물류센터 등등을 하면서 이것저것 해봤는데 목수가 노동력 투입 대비 일당의 가성비가 좋더라고요. 또, 목수는 고용이라기보다는 일감을 따라다니다 보니 늘 불안정한데요. 그게 저는 적당히 활동과 겸업을 하기도 좋더라고요. 여러모로 저와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꾸준하게 하고 있습니다. 목수 일이라는 것이 한번 하면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해요. 저는 개인적으로도 실수를 무척이나 경계하는 사람이거든요. 목공 일은 실수를 억제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과정인데, 이게 무척 괴롭지만 잘되었을 때의 즐거움이 제게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사실 아름다운 가구를 만드는 것보다 실수 없는 마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수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활동도 하랴 생업도 이어가랴 무척 바쁘게 지낼 것 같은데, 어진 님의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일까요?
목수 일을 꾸준히 하면서 지금은 제가 직접 목공소를 차려서 운영해나가고 있었는데요. 요즘은 사실상 목수로서 작업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집회를 준비하면서 송전탑 싸움에 애쓰려고 하다 보니 물리적으로 시간을 나누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예전에 일당 받고 일할 때랑 다르게 제 목공소다 보니 이를 유지하기 위한 고민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을 꺼뜨리지 않고 잘 균형을 잡으면서 유지해나가 보려고 합니다.
사랑방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사랑방과는 밀양 인권침해감시단으로 오시던 분들을 만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요. 그 이후로 세월호나 강정, 군산 미군기지 등 곳곳의 현장에서 계속 마주치면서 후원까지 하게 되었네요. 제가 목수를 시작하면서는 돈이 안 되는 일을 요청하더라고요. 사랑방 30주년 때 구조물을 만들어달라던가, 어디 집회 물품을 만들자던가 말이죠. 그래서 사랑방이 저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6월 8일 밀양 희망버스에 사랑방도 많은 사람을 함께 조직해서 와주면 좋겠습니다. 발전소와 송전탑을 만드는 방식은 무척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데요. 이것들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6월 집회를 계기로 앞으로 더 많이 고민을 나누는 자리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