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주 : 안기부가 대학교수를 연행·긴급구속하고 언론에 흘리는 과정은 ‘간첩 관련자’가 받는 대우, 인신구금 절차의 자의성, 언론의 ‘따라 춤추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관련된 민교협 성명 전문을 싣는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지난 5일 밤에 현직 대학교수 3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긴급 구속한 뒤 혐의점이 없자 7일 오전에 석방하였다. 안기부는 자수간첩사건을 수사한다며 이들이 뚜렷한 혐의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현재 안기부가 북한의 공작원으로 지목하고 있는 사람과 독일 유학시절에 이웃에 살았거나 몇 번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도 이미 10여년이 지난 일에 대해 긴급 구속장을 발부하였다. 안기부는 이들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긴급구속장을 제시하지 않고 혐의사실을 고지하지도 않는 등 최소한의 법적 절차도 무시하였다. 이처럼 안기부는 기껏해야 참고인에 불과할 이들을 피의자로 몰아 긴급구속장을 발부함으로써 수사권을 남용하고 대학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게다가 안기부는 조사가 끝나지도 않은 단계에서 피의 사실을 언론에 흘리고 대부분의 언론은 확인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이들 3인의 명예를 크게 훼손하였다. 일부 언론은 ‘붉은 장학금’ 운운하며 근거도 없는 사실을 유포함으로써 최소한의 양식도 저버리는 행태를 다시 한번 보여 주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이번 사건이 “북한의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대학교수가 된 사례가 있다”는 서강대 박홍 총장의 발언과 관련이 있다는 보도내용이다. 이는 안기부가 박 총장의 발언에 근거를 제공하기 위하여 간첩사건을 꾸민다는 의혹을 주기에 충분하다. 안기부가 변화하는 국제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공안분위기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닌지 심히 걱정스러운 것이다.
지난여름 이후 우리 사회는 이른바 ‘조문파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심한 공한한파의 몸살을 겪고 있다. 우리는 이 공안정국이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수구세력의 몸부림이었다고 보며 행여 이번 사건이 그러한 기도의 연장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이에 이 사회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우리 교수 일동은 이런 사건을 통해 민주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요건으로서 다음과 같이 요구하는 바이다.
1. 안기부의 책임자인 안기부장은 이번 사건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라.
1. 무책임한 보도를 한 언론은 반성하고 본인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모드 조치를 강구하라.
1. 이번 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박홍 총장은 북한의 장학금을 받았다는 교수의 이름을 밝히고 밝힐 수 없다면 총장직에서 용퇴하라.
1. 정부는 그간 인권유린의 대표적인 법 장치였던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여 문민정부의 의지를 밝혀라.
1천3백여명의 우리 교수 일동은 이러한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94년 10월 10일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