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이틀 앞둔 명동 상업은행 앞, 선물꾸러미를 가득 든 사람들로 북적북적 거리는 가운데도 30여명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50m 가량 줄을 길게 늘어서 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가가보니 뜻밖의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80년 5월 계엄군에 의해 희생당했던 광주 시민들의 사진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바로 옆 모회사 맥주 시음대회에는 단 한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아 요즘 유행하는 말로 썰렁한 분위기였다.
곁에서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예닐곱살로 보이는 한 꼬마와 그의 어머니인 듯한 여자가 나누는 얘기를 몰래 엿들었다. 사진을 올려다 보며 꼬마가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이게 무슨 사진이야” “무슨 사진같니” “6.25때 죽은 사람들 사진이야” “아니. 네가 태어나기도 전인 80년도에 정권을 잡으려고 전두환·노태우 일당이 광주시민을 죽인 사진이란다” “정말 나쁜 사람이네” “그런데 검찰이 나쁜 사람들에게 죄없다고 결정했단다” “나쁜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해” 라고.
이들의 얘기를 들으며 명절에도 아랑곳없이 역사를 지키는 파수꾼들이 생각났다. 광주에서 상경한 이들은 돌아갈 고향과 반겨줄 친척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꿋꿋이 서울 명동성당 농성장을 지키고 있었다. 충혈된 눈과 검게 그을린 얼굴에서 지난 여름 이들이 얼마나 힘겨운 투쟁을 해왔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6일로 5.18진상규명 명동성당 농성은 50일째를 맞이한다. 이들은 민족의 대명절 추석에도 아랑곳없이 특별법 제정과 특별검사제 도입을 위한 서명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박병율(5.18부상자회 사무국장, 40)씨는 “국민들의 진심어린 호응으로 48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서명에 동참했다”고 밝혔다. 명절인데도 왜 집에 내려가지 않는냐는 질문에 “나라고 왜 고향에 내려가고 싶지 않겠느냐! 하지만 국민들과 함께 투쟁하고자 서울에 남았다. 국민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우리에겐 소중하다”라고 밝혔다. 그는 “맨 처음 농성을 시작할 땐 시한부 농성으로 준비했으나 50일이 지난 지금은 극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으로 언제 농성을 끝내야할지 모르겠다”는 걱정까지 농담으로 던졌다. 또한 그는 “국민들이 서명에 적극 동참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 우리야 이렇지만 모두들 추석 잘 보내시라”고 인사까지 건넸다.
국민들의 관심과 기대가 이렇듯 눈에 보이는데 언제까지 역사의 심판으로 그 책임을 방기할 것인지. ‘나쁜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해’라고 말한 꼬마가 어른이 된 후 지금의 역사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 책임을 다하기위해 역사의 파수꾼들은 광주의 진실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