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하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한 현 동티모르 상황의 최대 피해자는 단연 아이들이다. 무력침공과 학살의 역사 속에서 아이들은 1차적인 식민의 피해자들이었고, 지금 동티모르의 빈곤은 다시금 아이들을 학교가 아닌 거리로 내몬다. 아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뜨거운 더위를 감수하며 생선 장수로, 과일 장수로, 그리고 버스 도우미로 나선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한가하게 차를 마시거나 담소를 나누는 풍경 건너편으로, 1.8 리터 짜리 물병만 들고 아무런 세차도구도 없이 손으로 그들의 차를 세차하는 소년을 보는 것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2002년 구성된 정부는 무상교육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이는 아직까지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 아니 현실화된다고 해도 하루 한 끼를 챙겨먹는 것조차 버겨운 아이들에겐 어쩌면 학교란 '사치'에 불과할 수 있다. 그나마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경우도 방과후에 할 수 있는 '놀이'라곤 공터를 뛰노는 것밖에 없다. 단적인 예로 동티모르엔 단 한 개의 서점도 없다. 서점이 없다는 것은 '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이 세상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한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주거공간은 어른인 나에게도 약간은 '공포스런' 기억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암흑 속에서 밤을 지내야하는 것, 공동으로 세면장과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것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다. 집안에 수도와 전기시설이 없는 것은 그만큼 위생적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얼마 동안 받아두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물로 몸을 닦고 양치질을 하고, 설거지통과 빨래통은 구분되지 않는다. 생쥐와 생활공간을 공유하고 벼룩과 이는 사람 몸을 놀이터로 삼는다. 집에서 키우는 맷돼지며 닭 등의 가축들이 집안을 헤집어 놓는 일은 차라리 애교다. 집이라곤 하지만 4면과 지붕을 막아놓은 것이 전부인 집들은 지방과 산간 지역뿐만 아니라 딜리 시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질병발생률은 높은 반면 의료시설(국공립 병원은 무료로 운영된다)과 위생교육은 턱없이 부족하고 '민간요법'에 기댄 치료 등이 계속되다 보니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임신여성과 영·유아의 사망률은 독립이후에도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여성들의 정의 세우기
여성단체가 주장하는 동티모르의 가장 큰 여성문제는 '(특별히 법적인 측면에서) 여성들의 정의가 부정되는 것'이다. 18개 여성단체들의 연합체인 REDE FETO의 우발다는 "가정폭력은 심각한 반면 가정폭력에 대한 규정은 없다"고 설명한다. 현재 동티모르 법원은 동티모르 형법이 제정되기까지 과도기적으로 인도네시아의 형법을 차용해 사용하고 있는데, 인도네시아의 형법은 신체적 폭력과 성적 폭력만을 규정할 뿐 정신적 폭력과 경제적 폭력 등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간 사건의 경우 여성들이 모든 증거를 제출해야하는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들이 현재 제정 과정을 거치고 있는 동티모르 형법에서 보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작성 중인 법안은 포르투갈어로 되어 있어 이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물론 의회가 여성단체의 의견을 듣는 어떤 자리도 만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단체들은 어떤 내용으로 법안이 작성되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여기에 현재 동티모르의 법원이 제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는 것 역시 '부정의'를 존속시키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동티모르는 3심제를 채택하고는 있지만 현재는 과도적으로 3개의 지방법원과 1개의 고등법원만이 운영되고 있다. 게다가 운영되고 있는 법원조차도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의 인력부족으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고, 재판을 원할 경우 재판 가능지역으로 옮겨오는 수고를 감수해야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재판을 포기하게 된다. 특히 가정폭력을 '폭력'의 문제보다는 '개인적인 문제' 혹은 '여성의 책임'으로 치부하는 법 집행관들의 분위기와 '여성에 대한 폭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식조차 없는 사회적 풍조는 사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여성들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 걸림돌로 작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