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인들의 계속되는 투쟁
그러나 동티모르를 기억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아직까지 동티모르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가 1975년 12월 7일 동티모르를 침략한 이후 1999년까지 수많은 살인·고문·성폭행·강제실종·불법감금 등 유엔헌장과 로마규정에서 정하고 있는 반인륜범죄와 대량학살을 저질렀는데도, 아직까지 이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처벌을 위한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9년 5월 5일 인도네시아·포르투갈·유엔이 동티모르인들에게 독립 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1999년 초부터 동티모르 독립에 대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이를 막기 위한 인도네시아 군대와 민병대의 만행이 대대적으로 자행되었다. 국민투표가 진행된 1999년 8월 30일을 전후해서는 학살과 재산파괴가 절정에 달했다. 유엔은 1999년 약 1,3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독립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파견된 유엔 직원들도 공격당했다.
유엔은 '동티모르 국제조사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Inquiry on East Timor)를 임명하고 1999년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시작했는데, 국제조사위원회는 국제법정을 설립하여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인도네시아, 단 한 명만 유죄판결
하지만 유엔은 인도네시아에게 기회를 주었다. 인도네시아는 자체적으로 1999년 9월 '인권침해 조사위원회'(Commission of Inquiry into Human Rights Violations in East Timor, KPP HAM)를 설립하여 포괄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임시인권법정'(Indonesia Ad Hoc Human Rights Court on East Timor)을 설립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검찰총장은 실제 책임자는 배제한 채 위로부터 지휘를 받고 움직인 18명만 기소했고, 임시인권법정은 그 중 한 명에 대해서만 징역3년의 유죄판결을 확정했다.
한편 동티모르 독립 이후 설립된 유엔임시행정위원회는 1999년 사건 조사를 위해 동티모르 검찰총장 산하에 '중대범죄진상조사단'(Serious Crimes Unit)을, 재판을 위해 딜리지방법원 안에 '중대범죄특별법정'(Special Panel for Serious Crimes)을 설립했다. 중대범죄란 △대량학살(Genocide) △전쟁범죄(War crimes) △반인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 △살인(murder) △성폭행(Sexual offence) △고문(Torture) 등이다. 동시에 유엔임시행정위원회는 '화해와 진실위원회'(Commission on Reception, Truth and Reconciliation)를 설립하고 중대하지 않은 범죄에 대해서는 화해를 통해 처벌을 면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했다. 중대범죄특별법정에 95건, 총 440명이 기소되었는데 이 가운데 339명은 인도네시아 등 관할권이 미치지 않은 외국에 거주하고 있어 재판을 진행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 군대 서열 6위이며 반인륜범죄를 지휘했던 위란토에 대해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지만 인도네시아에 거주하고 있어 집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에서 진행된 사법절차는 독립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절 또는 유엔이 동티모르에 들어온 이후에 발생한 사건을 대상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의실현 측면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반인륜범죄와 대량학살의 실제 책임자에 대하여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많은 동티모르인들이 분노하고 있다.
동티모르인들, 국제전범재판 요구
동티모르인들과 국제시민사회단체는 유엔에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에서 진행된 중대범죄사법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며 국제법정의 설립을 요구하였다. 유엔은 올해 2월 18일 '전문가 위원회'(Commission of expert)를 구성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전문가위원회는 5월 26일 유엔인권고등판무관에게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동티모르 정부에 대해서는 중대범죄에 대한 조사와 재판을 계속 진행하고 △이에 대해 유엔이 지원하며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해서는 사무총장이 정한 기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조사와 재판을 다시 진행하라고 권고했다.
또 전문가위원회는 두 정부가 위 권고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유엔은 국제전범재판을 설립해야 하고 국제전범재판을 설립하지 않을 경우 국제형사재판소의 활용가능성을 고려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 및 인도네시아 정부와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동티모르 정부는 유엔의 권고사항을 따르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두 정부는 2004년 12월 14일 설립하기로 합의한 '진실과 친선위원회'(Commission of Truth and Friendship)에서 1999년 문제를 일괄 해결하겠다는 입장이다. 이 위원회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도 사면을 권고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을 사실상 지원하거나 암묵적으로 용인한 미국·영국·호주도 인도네시아와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1999년 사건에 대한 국제전범재판 설립을 반대하고 있다. 높은 비용과 비효율을 형식적인 이유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1999년 동티모르에서 발생한 살해·고문·불법감금, 동티모르인들에게 가해진 집단 살해는 명백히 유엔헌장과 로마규정에서 정하고 있는 반인륜범죄이고 대량학살이므로 반드시 처벌되어야 한다. 약 4년 전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도 1999년 4월 인도네시아 군대와 민병대가 수십 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했던 리키샤(liquica)를 방문해, "가해자 처벌을 통해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겠다"고 말했고, 2004년 11월 9일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가해자가 처벌될 수 있도록 유엔 회원국들의 협력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2003년 7월 전 인권고등판무관 로빈슨도 '동티모르 1999, 반인륜범죄'라는 보고서에서, "유엔은, 인권을 침해한 가해자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줄 특별한 책임이 있다. 조속한 시일 내에 동티모르 국제법정을 설립해야 한다. 안전보장이사회와 사무총장은 이를 위해 필요한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동티모르 정부가 더 이상 정의실현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는 이상 국제전범법정을 설립해 동티모르 내에서의 정의를 완성해야 할 것이다.
1999년 이전 범죄도 처벌해야
그리고 1999년 사건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침략 이후부터 자행된 반인륜범죄와 대량학살에 대해서도 전범재판을 통해 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동티모르 헌법에서도 "1974년 4월 25일부터 1999년 12월 31일까지 발생한 반인륜범죄, 대량학살,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국내 또는 국제 법정을 통해 사법조치를 취해야 한다(제160조)"라고 규정하고 있다.
많은 동티모르인들은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발전도 없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동티모르 침략 및 반인륜범죄와 인권침해의 실질적인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포기할 경우, 보복을 통한 또 다른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인도네시아 정부가 25년간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인권침해를 자행했기 때문에 조사와 재판을 통해 진상을 명백히 밝히고 기록을 남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로 옮겨간 동티모르 학살자들
그러나 무엇보다 동일한 인권침해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범재판의 설립은 절실하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 인권침해를 주도한 군장성들을 승진시켰고 2004년 초 전 동티모르 경찰 간부였던 팀빌 실랜(Timbil Silaen)을 웨스트 파푸아 경찰 간부로 임명했다. 동시에 악명 높았던 동티모르 민병대장 유리코 구테레스(Eurico Guterres)를 와메나(Wamena) 지역에 임명하고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를 구성하도록 했다. 이 두 사람은 1999년에 발생한 동티모르 학살사건에 연루된 자들인데, 동티모르에서 한 것과 똑 같은 반인륜범죄를 웨스트 파푸아에서 되풀이하고 있다.
동티모르 인권침해의 실질적인 책임자들이 사실상 면책을 누리는 이상, 아체와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은 동티모르인들이 겪은 고통의 길을 그대로 밟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동티모르인들은 국제전범법정의 설립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피해자 가족, 시민사회단체, 동티모르 내 국제 시민사회단체, 학생조직 등 42개 단체가 '국제전범법정 설립을 위한 동티모르 연대모임'(East Timor National Alliance for an International Tribuanl)을 구성하고, 인도네시아 침공 이후부터 1999년까지 발생한 전쟁범죄 및 반인륜범죄 등에 대한 국제법정 설립을 위해 미국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하는 등 구체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진정한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동티모르인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