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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세계의 인권⑤ 집단학살(제노사이드 조약)과 정치적 살인

아메리카 인디언, 유태인, 조선인 학살에서 최근 브룬디, 르완다, 동티모르에 이르기까지

‘광주’로 얼어붙었다 녹아내렸다 하는 심장을 부둥켜 안고 살아온 우리에게 집단학살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뉴욕에 위치한 제노사이드연구소의 90년 보고서에 따르면, 45년 이후로 전쟁과 자연재해로 죽은 사람의 2배에 가까운 수가 집단학살과 대량의 정치적 살인으로 희생되었다고 한다. 사실 집단학살은 전세계 어디서나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알려지지 조차 않은 채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고대문학은 사라진 민족과 도시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지만 그들 집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으며, 다만 악마의 종교와 사악한 민족을 무찌른 승리자들의 이야기로 미화되어 있을 따름이다. 20세기 중반에 와서야 집단학살의 사례들이 조금씩 보고되기 시작했으나, 많은 진실이 묻혀있기는 여전히 마찬가지다.

학살자들은 언제나 많은 증거를 인멸했으며, 학살에 관한 정보에의 접근을 통제하면서 교묘하게 역정보를 퍼뜨려 왔다. 이리하여 분명히 있었던 사건에 대하여 언급조차 하지 않으려는 집단적 부인현상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집단학살’이란 48년 유엔 제노사이드(Genocide) 조약에 규정된 국제법상의 범죄로서, 어느 국민.민족.인종.종교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전멸시킬 의도로 행해지는 행위를 말한다. 그것은 이들 집단에 대한 계획적인 대량학살은 물론 신체적.정신적으로 치명적인 해를 입히는 행위, 생활조건에 고의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행위, 출생을 억제하기 위해 의도적인 조치를 강제하는 행위, 그 집단의 어린이들을 강제적으로 다른 집단에 옮기는 행위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집단학살 연구자들은 제노사이드에 대한 이러한 정의에 비판적이다. 그들은 집단학살의 주요 희생자가 사회.정치.경제적 집단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집단학살의 대상을 국민.민족.인종.종교집단에 한정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정의는 이렇게 된다. “억압자에 의해 특정된 집단과 그 구성원을 절멸시킬 의도로 국가나 여타 당국이 저지르는 일방적인 대량 살인의 형태”. 즉 ‘집단’의 유형에 제한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흔히 학살자들은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학살하고 싶은 집단들을 국가나 지배집단에 대한 조직화된 반대세력으로서 정의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예를 들어 ‘파괴자’ ‘국민의 적’ ‘사회의 독소’ 등 일반적인 집단의 정의에 들지 않는 용어로도 규정하기 때문이다.


집단학살의 대표적 유형들


(1)선주민과 소수집단에 대한 집단학살

아메리카 인디언의 운명이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예이다. Human Rights Quarterly (11)는 현재 1백26개국에 걸쳐 2백37개 사회적.민족적 소수집단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고한 바 있다.


(2) 불평등한 통치구조하에서의 독립에 뒤따른 학살

20세기 인류최대의 비극으로 일컫어지는 브룬디(Bumudi)와 르완다(Rwanda)의 참상이 그 예이다. 93년말 브룬디에서는 적어도 50여 개 시에서 일어난 학살로 수주만에 5만명에서 8만명 가량이 살해되었고, 약 70만명의 난민을 순식간에 낳았다. 94년 르완다에서는 3개월도 채 못되는 기간동안 50만명에서 1백만명 사이의 인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 비극의 원인은 투치(Tutsi)족과 후투(Hutu)족 간의 종족갈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제노사이드 연구자들은 이들의 오랜 역사와 문화 속에서는 종족갈등의 씨앗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종족의 차이는 두 집단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에 기반한 벨기에의 위임통치와 그 통치구조를 유지한 독립을 통해 불거지게 되었다.

투치인인 소수 지식인이 전체인구의 85%에 해당하는 후투인을 지배하면서 후투인은 정치.교육.경제적 무대에서 완전히 배제당해야 했다. 독립후 후투인의 쿠데타와 투치당국의 보복, 갈등과 두려움의 확산, 또다른 살인과 보복이 이어져왔고 상상을 초월하는 학살의 무대를 연출하게 되었다.


(3) ‘자주’와 ‘독립’ 요구를 억누르기 위한 학살

이 경우 학살자는 그 대상집단이 적과 내통하였다거나 사탄의 종교를 섬기고 있다거나 하는 악선전을 일삼지만 실제로 이들의 자주와 독립요구를 묵살하는 이유는 이들 거주지역의 풍부한 경제적 자원을 장악하기 위해서이다.

75년 인도네시아에 의해 불법강점된 후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20만명이 학살당해온 동티모르나, 이라크군의 화학무기 공격으로 폐허가 된 고향마을에서 사막으로 내몰린 쿠르트(Kurds; 이라크 내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로 독립시도는 좌절된 채 이라크 정부의 공격을 여러차례 받아왔다.

걸프전 이후 유엔이 이라크 내에 ‘안전한 하늘’이라는 거주지대를 마련하였지만 여전히 공격의 위협하에 있다. 이들이 조상대대로 살아온 땅에는 석유가 풍부할뿐더러 유럽으로 통하는 주요도로와 석유파이프 라인이 있다)인의 비극이 그 예이다.


(4) 국가 내부의 결속을 강화시키기 위한 볼모로서의 집단학살

한 국가 내의 여러가지 사회적, 계급적 불만을 일정한 집단으로 쏠리게 하고, 그 집단을 학살함으로써 국가적 결속을 높이고자 하는 경우이다. 나찌의 유태인 학살과 짚시학살, 일본군국주의에 의한 조선인 학살 등이 그 예이다. 현대의 예로는 이란 내의 바하이 교도 학살을 들 수 있다. 79년 이란 내의 이슬람 혁명이후 90년대까지 35만명의 바하이 교도중 2만명 이상이 처형되었고, 자의적 구금과 고문, 교육과 고용의 봉쇄, 집과 소유물의 압수가 자행되었다.

폐쇄된 지역에서 발생하는 집단학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많은 경우 서방언론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서방언론이 그 학살사건의 어느 부분에 초점을 두는가, 얼마나 보도를 지속시키는가 그리고 어떻게 명칭을 붙이는가 등등에 따라서 그 학살사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일방적인 살인이라는 사실이 무시되고 쌍방의 갈등으로 부각된다든지,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국가권력의 학살행위가 비조직적이고 우발적인 민족.종교 집단의 폭동의 결과로 둔갑한다든지 혹은 민간단체나 실제 체험자인 난민의 증언은 과장된 것으로 무시되고 해당 정부가 제공한 정보에만 크게 의존한다든지 하는 경우에 진실은 가려지고 비극은 계속되게 마련이다. 정치적인 또는 문화적인 편견과 거기에 따르는 치우친 인식, 그리고 체계적인 정치․경제적 제재가 집단학살의 보도를 가로막게 된다. 어쨌든 학살사건의 상업적 보도는 왜곡되기가 십상이다. 하나의 집단학살이 미국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는 학살희생자가 아주 무고한 존재로 보여야 하며 그들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야만 하며, 그런 사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미국이 상당한 힘을 가진 것으로 비쳐져야만 한다고 <워싱턴포스터>지의 한 기자는 털어놓은 바 있다.

한편, 사실이 사실대로 보도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집단학살을 받아들이는데는 큰 장애가 있다. 사람들은 진짜로 무고한 자들이 희생자가 될 리 없다는 미신을 갖고 희생자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한 예로 나찌가 유태인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 행해진 미국대중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이다. 미국대중은 유태인들이 전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자신들이 희생될 만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믿고 있었다.

또한 몇 백명, 몇 천명, 몇 만명의 죽음을 하나하나 독립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의 죽음으로 인식하기는 사실 매우 어렵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아니었더라면 우리에게 6백만명의 죽음이 6백만개 인격의 죽음이라고 인식되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장애물은 또 있다. 집단학살의 예방에 실패했을 때는 학살을 중지시킬 수 있는 개입이 필요하며 사후적으로라도 학살자의 처벌이 필요하다. 그러나 집단학살을 간과해 버리는 위험과 함께 어떤 국가에 낙인을 찍기 위한 정치적 의도로 섣불리 집단학살이라고 규정해 버릴 위험이 있다. 인도주의적 개입(자국민이 관련되어 있지 않다할지라도 타국에서의 생명권의 엄청난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강제적인 개입을 허락하는 국제법상 개념)은 수십년간 토론되어 왔고, 인도주의적 개입을 정당화하는 기구와 이론이 상당수 존재하지만, 다른 정치적 동기를 위장하기 위하여 강대국이 인도주의적 개입을 주장할 위험이 또한 존재한다.

제노사이드 조약에 따라 처벌되는 범죄의 개념에는 현실의 집단학살만이 아니라, 집단학살을 저지르려는 음모와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선동과 시도, 동조행위가 포함된다(3조). 이와같은 일을 저지른 자는 헌법상의 통치자건, 공무원이건, 사적개인이건 간에 처벌받아야 하며(4조), 그 행위가 저질러진 영토국가 내에서 뿐만 아니라 이 조약 당사국에 대해 사법권을 가질 수 있는 국제형사법정에서 재판에 회부되야만 한다(6조).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무력하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권력자에게 차별과 억압에 기초한 사회구조를 바꾸라는, 도덕성에 기초한 인권호소는 일반적으로 효력이 없다. 자결의 독트린은 종종 도덕의 옷을 입은 국가이기주의의 도구로, 그리고 독재적인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이용되어 왔다. 이런 사이비 자결론은 유엔의 힘을 행사하느데 있어 가장 큰 독소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유엔 회원국 대표의 협의과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절차’와 ‘기구’를 만들 필요가 있다. ‘국제형사법정’의 설립이나 유엔 밖에서의 조직적인 활동형태(조기경보시스템 같은)를 창조하는 것이 그 예이다. 특히 국제적 민간단체의 조직적 활동이 요구된다. 집단학살은 대부분 정부가 저지르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사실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실험의 결과는 매우 중요하다. ‘학살자는 반드시 처벌된다’는 결론은 증명된 바 없기 때문이다. 【류은숙 인권교육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