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적 방식으론 의료의 공공성 살아남기 어렵다”
1. 한국보건의료의 기본 성격
한국의 보건의료를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구조적 특성은 그것의 사적(私的) 성격이다. 예를 들어 의료시설의 양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인 병원 병상수만 하더라도 전체의 약 75%를 민간이 차지하고 있어 민간 우위의 정도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굳이 사적 성격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병원시설의 소유 주체와 무관하게 어느 의료기관도 영리추구와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극소수의 국립병원을 빼고는 정부가 운영 주체가 아닌데다가 별도의 직접적인 재정지원도 없다. 따라서 거의 모든 의료기관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의료기관 운영을 위해 수익을 올리지 않을 수 없고, 이는 한국 의료의 사적인 성격을 불가피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의 응급환자 기피 문제는 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라 할 만하다. 아무리 환자가 많은 대학병원에서도 만약을 대비해서 응급환자를 위해서 어느 정도 이상의 여분의 병상과 수술시설을 갖추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이 일반 국민들의 정서이고 사회적 요구일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비어 있을 이런 여분의 병상과 시설에 대한 부담은 누가 해야 할까? 굳이 답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스스로 수익을 올려 운영을 해야 할 병원이 이것을 아무 조건 없이 부담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면, 그 부담은 사회 전체가 나누어야 한다. 이것이 의료가 가지는 공적 성격이다.
난맥상을 보이는 의료전달체계도 마찬가지다. 동네 의원은 나날이 줄고 영세해지는 반면 재벌 기업까지 가세한 대형병원의 위세는 한국의 보건의료체계를 유례 없이 기형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이 역시 일반 국민과 의료인, 그리고 병원의 비윤리적, 이기적 자세를 탓할 일이 아니다. 사적인 성격의 한국 의료가 보일 수 있는 전형적인 운동, 발전 방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중병이 아닌 가벼운 병은 집 근처 1차 의료기관에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공공의 논리는 경쟁력과 효율성으로 대변되는 대형병원의 자본주의적 운동방식 속에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2. 보건의료에 대한 재인식
보건의료를 사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사회적 정향성은 어느새 일반 국민들의 인식 속에서, 그리고 문화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병에 걸리면 으레 개인이 해결하는 것이 보통이고, 경제적인 부담도 개인이나 가족이 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보건의료의 사적 지향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의료의 질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이다. 전 세계적으로 의료의 질을 사적 영역에 맡겨 두는 체계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사 보건의료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이나 개입이 없는 경우에도 의료의 질에 대해서만은 국민의 건강보호라는 차원에서 강력한 감독과 개입이 이뤄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는 핵심요소인 의료의 질조차 민간의 손에 전적으로 맡겨져 있는 상황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해가 갈수록 국가의 책임이 오히려 뒷걸음치고 있다는 것이다.<표 참조>
보건의료나 복지 정책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정향성은 상당 부분 보건의료가 가지는 사회적 가치를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잘못된 인식의 요체는 보건의료를 생산적인 투자가 아닌 소비적인 것으로, 권리가 아니라 시혜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고, 이는 삶의 질과 사회의 균형발전이 아니라 GNP로 상징되는 외형적인 경제성장을 역사 발전의 중심에 놓는 전도된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3. 보건의료의 구조개혁
구조개혁의 일차적인 목표는 공공의료의 강화와 더불어 영리 추구를 매개하고 있는 보건의료 기관과 인력의 경제적 유인 기제를 근본적으로 개편하는 것이다.
구조개혁의 목표를 찾고 이에 동의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과제는 남는다. 무엇을 계기로 어떤 힘에 의해 구조개혁의 추진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가능성의 단초를 일반 국민, 소비자, 환자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다. 일반 국민과 소비자가 놓은 변화의 주춧돌은 조직화된 노력에 의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다. 조직화된 노력의 일차적인 내용은 크게 두 가지 분야로 좁혀볼 수 있다. 하나는 보건의료 내부와 정부의 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보건의료의 바람직한 지향성을 새로 생산하고 이를 유통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지향성이란 보건의료의 ‘상품적 요소’를 최소화하고 공공의 논리를 기초로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것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보건의료의 문제는 더 이상 개별적인 문제에 머무르지 않는다. 정치와 이념의 영역에 폭넓게 걸쳐 있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보건의료의 바람직한 발전은 이러한 정치․이념적 발전과 무관할 수 없다. 보건의료와 복지에 대한 근본적 인식 틀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기이다.
* 정부 예산 중 보건분야 지출비율(단위: %)
1980 / 1993
한국 1.2 / 1.0
호주 10.0 / 12.6
프랑스 14.8 / 16.1
독일 19.0 / 16.8
미국 10.4 / 17.1
영국 13.5 / 14.0
말레이시아 5.1 / 5.7
브라질 4.0 / 5.2
터키 3.6 / 3.0
태국 4.1 / 8.2
필리핀 4.5 / 3.0
이집트 2.4 / 2.1
스리랑카 4.9 / 5.2
<출처>세계은행 『World Development Report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