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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기획: 안기부와 인권 ① 중앙정보부의 탄생

국민을 가상 ‘적’으로 삼고 탄생한 중정

8월 개원을 앞둔 임시국회는 지난해 말 날치기 통과된 안기부법이 그대로 굳어지느냐 재개정 되느냐는 갈림길에 서 있다. 정부․여당과 안기부는 정권의 안보와 안기부 조직의 이해관계 때문에 안기부법을 개악했다. 안기부법과 함께 통과된 노동법에 대해서는 노동계의 총파업 등으로 재개정되는 운명을 맞았지만, 안기부법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안기부와 정부는 개악된 안기부법을 그대로 굳히고 싶어 할 것이다. 이것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나 국민을 위해서나 불행한 일이다. 이에 <인권하루소식>에서는 안기부법의 재개정 움직임에 작은 힘을 보태고자 이 기획시리즈를 준비했다. 이번 집필에는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 고상만(전국연합 인권위 간사) 김수경(편집장) 이창조(기자) 씨가 참여했다. 앞으로 9회에 걸쳐 게재하게 될 이번 기획을 통해 안기부가 결코 국가안보가 아닌 정권안보를 위해, 국민의 인권을 짓밟아온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안기부의 올바른 정립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기대를 바란다. <편집자주>


창립 36돌

6월 10일은 기억할 일이 많은 날이다. 일제시대 광주학생의거 기념일이기도 하고, 87년 6월항쟁 기념일이기도 한 날이지만, 중앙정보부법이 통과된 날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제2공화국 민주당 정부를 뒤엎은 박정희 군사집단은 쿠데타 25일만인 그 해 6월 10일 중앙정보부법을 제정 공포한다. 법률 제619호로 공포된 이 법은 본문 9조와 부칙 2조로 이뤄진 엉성한 법률이었다. 하지만, 이 법의 공포로 말미암아 중앙정보부는 합법적인 기관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며, 이후 80년 등장한 신군부 쿠데타 집단이 안기부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 세력들은 61년 6월 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하였고, 6월 1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법과 중앙정보부법을 공포했다. 그러니까, 쿠데타 세력이 세 번째로 제정 공포할 정도로 중앙정보부의 중요도는 매우 비중이 높았던 것이다. “공산세력의 간접침략과 혁명과업 수행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최고회의에 정보부를 만들었고, 이 정보부를 통해 정치적 반대세력들을 ‘효과적’으로 제거, 탄압했다. “군정 주체들은 그들의 ‘장애 제거수단’으로서의 물리력을 정보부로 설정해 놓고 있다. 이름대로 정보수집기구가 아닌 방아쇠를 당기는 집행기구로 출발한 것이다.”


다른 정보수사기관에 대한 조정․감독권 부여

중앙정보부법은 출발 때부터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죄 수사를 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군을 포함한 정부 각부 정보수사 활동을 조정․감독할 권한마저 가졌다. 이에 따라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설치된 특별기구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절대 권력을 가진 공포의 괴물로 탄생했다. 정보부장은 정보 수사에 관하여 다른 기관 소속직원을 지휘․감독할 수 있었고, 중앙정보부의 수사관은 범죄수사권을 갖지만 검사의 지휘도 받지 않았다. 또,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 국가기관으로부터 필요한 협조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되었다.

중앙정보부법은 박정희의 지시를 받은 김종필의 지휘로 이뤄졌다. 증언들에 따르면, 당시 김종필은 “(61년) 6월이 오기 전에 정보부법을 만들어야 한다. 정보부가 서야 혁명과업을 시작한다”며 독려했다고 한다. 김종필은 쿠데타 이틀 후 정보계통 중령들인 서정순(행정개혁위원장 역임), 이영근(7, 9, 10대 의원), 김병학(중정국장 역임)을 불러서 작업을 지시했고, 이에 이후 신직수(7대 정보부장)가 가세해 법 조문을 완성했다. 쿠데타 이틀 후에 김종필의 지시로 시작되어 22일만에 공포된 이 법은 미국의 CIA와 일본 내각조사실을 절충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제시대 경찰에서 다시 정보부 직원으로

처음 출발할 때부터 중앙정보부는 김종필을 위시한 쿠데타 주축인 육사 8기생의 현역군인들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정보경찰, 특고(特高) 출신, 일제시대 경찰로 수사 취조 고문 기술자들도 합세했다. 그렇게 8백명의 인원으로 출발한 중앙정보부는 태평로 등 몇 개 사무실에 분산되어 있다가 남산과 이문동에 그 둥지를 튼다(이전까지는 정보기구는 군 정보기관, CIC, HID, 방첩대 등으로 분산되어 있었고, 민주당 시절에는 미국의 종용에 의해 설립된 총리실 직속의 중앙정보위원회가 있었다. 이 중앙정보위원회 위원장은 미국의 강력한 후원을 받은 이후락이 책임자였다).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 그 외 다른 나라의 정보기관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치열해지는 국제관계 속에서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해 대외 정보수집을 목표로 탄생했던 것과는 달리 중앙정보부는 정권의 안전을 위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런 중앙정보부는 18년간 박정희 정권의 안전을 위해 복무하다가 80년에는 전두환 세력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되는 것이다. 조용환 변호사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이런 점에서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안기부는 처음부터 국가의 대외적 안전이 아니라 반민주적인 정권의 안전보장을 존립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안기부의 잠재적인 ‘적’은 국민이었다. 안기부의 속성 자체가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방향으로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