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간 광주항쟁의 한복판에
19일 오전 11시 광주 전남도청 5․18기념탑 앞에서 한 외로운 의인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고인(故人)은 5․18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섰던 김영철(50) 씨. 당시 시민학생투쟁위원회 기획실장이었던 그는 80년 5월 27일, 윤상원 열사와 함께 도청에서 최후까지 저항했던 마지막 시민군이었다.
그는 윤상원 열사의 죽음을 목격한 뒤 자결을 시도했지만 실패, 계엄군에게 체포됐다. 이후 상무대 영창에서 ‘간첩 혐의’를 씌우려는 계엄수사대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던 그는 자살을 기도하며 머리를 콘크리트 모서리에 부딪혔고 그 충격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갖게 됐다. 김 씨가 수사도중 자살을 기도한 것은 ‘간첩으로 몰리면 5월항쟁이 국민에게 왜곡될 것’을 걱정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김 씨는 81년 석방됐지만, 정신이상증세가 심해져 84년 나주정신병원에 입원했고 그후 기나긴 투병생활을 하게 된다. 투병중이던 김 씨의 의식은 5월 27일 이전 상황에서 멈춰 있었다. 그는 문병 간 친지들에게 박관현(82년 광주교도소에서 사망) 씨의 안부를 걱정하거나 “도청지도부의 임무를 윤상원 씨에게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곤 했다.
98년 1월 상태가 극도로 악회된 김 씨는 친지들의 노력에 의해 조선대병원으로 옮겨졌으며, 3개월 뒤엔 영광 기독신화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그러나 올해 7월 21일 빵을 먹던 중 기도가 막혀 위독해 진 뒤, 결국 8월 16일 오후 3시45분 영면했다.
김영철 씨는 1948년 의사인 김경묵 씨의 3남중 둘째로 태어났으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보모로 일하던 목포의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5급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공무원 사회의 비리를 통탄해 직장을 집어치운 그는 1977년 YWCA 간사로 일하게 되면서 지역운동에 몸을 담게 됐다. 이어 1978년 친구의 소개로 윤상원, 박관현, 박기순, 신영일(모두 작고) 씨 등 들불야학의 강학들을 만나게 됐으며, 들불야학의 교장이 되어 노동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80년 5월 비상계엄확대와 더불어 시민학생에 대한 학살만행이 자행되기 시작하자 5월 19일부터 들불야학팀과 함께 ‘공수부대의 잔학상과 이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투쟁소식’을 알리기 위해 대자보와 투사회보를 제작․배포했던 그는 25일 사태가 급박해지자 차량과 유류통제, 도청출입통제, 무기 및 보급품 관리 등을 관장하는 기획실장 역할을 맡았고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게 되었다.
모진 고문으로 정신이상의 고통을 겪던 그에게 있어, 광주항쟁은 18년 동안 진행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