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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요약> 21세기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학술대회

3주제: 냉전체제하 양민학살의 실상 - 제주 4․3과 여순사건 -


◎ 여순사건의 회고
김계유(사학자)

48년 10월 19일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미리 반란을 준비중이던 신월리 14연대는 탄약고와 무기고를 점령하고 3개 대대 병력을 장악한 뒤 20일 새벽 여수 시내를 장악했다. 이어 21일 여수군청을 비롯해 시내 금융기관과 중요기관의 사무를 인계받았으며, 23일에는 우익진영의 주요인사 14명을 처형하는 등 88명의 경찰과 민간인을 처형했다. 그러나 14연대는 25일 국군의 대규모 공격을 피해 지리산으로 입산했다.

26일 시내로 진입한 진압군은 4곳의 수용소에 시민들을 집결시켰다. 이로부터 3일간, 반란에서 살아남은 경찰관과 우익진영 요인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처형대상을 골라냈다. 그들이 사람들의 얼굴을 훑고 다니다 “저 사람”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바로 뒷뜰로 끌려가 즉결처분이 이뤄졌다.

28일부터 40세 미만의 남자들이 모두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돼 반란 가담여부를 심판받았다. 대상자는 약 5백명 가량이었는데, 거의 보름동안 진행된 가담자 색출작업은 천인공노할 인간 도살이었다. 쌀쌀한 초겨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을 팬티만 입힌 알몸으로 종일 학교 마당에 앉혀 놓았으며, 한사람씩 조사실로 불러들여 장작으로 매타작을 하면서 억지자백을 받아냈다. 장작개비에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마치 동물의 마지막을 알리듯 울부짖음을 토하거나 생똥을 싸면서 까무라쳤다. 누구는 매질이 무서워 자백을 하고 또 누구는 삶 자체가 싫어져 자백하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해서 4개 수용소에서 즉결처분된 사람과 종산국민학교에서 처형된 사람의 인원수가 당시 계엄사령부의 발표에 의하면 여수 1천2백명, 순천 1천1백34명에 달했다.


◎ 제주 4․3 양민학살사건
양조훈(제밀일보 전편집국장)

제주 4․3의 도화선은 47년 3․1절 시위에서의 발포사건이었다. 이후 제주도에서는 3월 10일부터 민관합동 대규모 총파업이 전개됐고, 미군정은 본토에서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끌어들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경찰과 서청 단원들이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분 아래,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연행․투옥․고문하는 등 백색테러가 잇따랐다. 4․3 발발 직전까지 1년간 2천5백명이 구금되었으며, 48년 3월 모슬포 등지에서 잇따라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는 등 긴장은 계속되었다.

48년 미군정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결정하자, 남로당 제주도 조직은 4월 3일 ‘단선 반대’의 슬로건을 내걸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5월 10일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된 총선 결과, 제주도의 2개 선거구에서 과반수 미달로 선거가 무효 처리됨으로써 제주도는 남한 내에서 유일하게 단독선거 거부지역이 되었다.

이렇게 5․10선거가 저지된 직후 군 병력과 함께 응원경찰대도 크게 증강됐다. 48년 10월 17일 토벌대는 해안선에서 5Km이상 떨어진 지대를 통행하는 자에 대해 전원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제주도에서 해안 마을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들이 이에 해당되는데, 들판이든 마을 안이든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발포하겠다는 무시무시한 작전이었다.

가장 참혹한 희생은 48년 11월부터 약 5개월간 집중되었다. 토벌군은 게릴라들의 피난처와 물자공급원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1백여 곳의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웠다.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애는 이른바 삼진(三盡)작전은 한라산 기슭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49년 1월 17일 해변마을인 조천면 북촌리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두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흥분한 군인들이 마을의 온 가옥에 불을 붙이고 남녀노소 약 3백명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군인들은 이튿날 대대본부로 주민을 집결시켜, 그 가운데 1백명 가까운 사람들을 다시 ‘빨갱이 색출작전’ 아래 총살했다.

48년 12월 14일 밤 표선면 토산리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들을 총살했으며, 젊고 얼굴이 고운 여자들을 불러내 성폭행한 뒤 총살했다.

토벌대는 또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며 그 부모․형제를 대신 학살했다. 48년 12월 22일 표선리로 소개된 가시리 주민 76명은 호적을 일일이 대조당한 뒤 집단 학살됐다.

48년 제주도에서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됐다. 희생자의 숫자는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3만명 안팎으로 추정되며, 당시 섬주민을 25만명으로 본다면 8명 중 1명이 희생된 셈이다. 당시에는 ‘전쟁 중에는 적군과의 교전 중이더라도 상대방이 전투를 계속할 능력이 없을 때는 함부로 살해해서는 안된다’는 기본 철칙마저 완전히 상실된 상태였다.

초토화작전의 배후에는 미군이 도사리고 있다. 4․3 발발 직후 제9연대장이었던 김익렬 장군은 “군정장관 딘 장군의 정치고문이 제주폭동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또 제9연대 정보참모였던 이윤락 씨는 “CIC 소령이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적성 지역으로 간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고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