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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시평> 그거 또 외우는 건가요?

구속력 있는 법이나 조약을 놔두고 새삼스레 무슨 선언인가?


지난 11일, 일요일 저녁이었다. 맘껏 편안한 자세로 뒹굴며 TV 뉴스를 보다가 벌떡 일어나 앉게 되었다. 뉴스 내용은 이러했다. 교육부가 학교폭력과 교사 체벌, 성 차별적 교육에서 벗어날 권리를 천명한 ‘학생인권선언’을 제정하여 오는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에 맞춰 공포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선언을 학생지도 지침으로 삼는 한편 위반하는 교사나 학생 등은 가중 처벌하겠고 무의식적으로 성차별을 강조하는 교과서 내용도 개정한다고 했다.

이 뉴스를 접하며 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구속력이 있는 법이나 조약을 놔두고 새삼스레 무슨 선언인가?’, ‘도대체 누가 만드는 걸까?’, ‘벌써 10월 중순인데 12월 10일에 공포하겠다니 그렇게 서둘러서 되는 일일까?’ ‘선언을 위반했다고 처벌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런 물음표들은 곧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하는 탄식의 느낌표로 바뀌게 되었다. 학생인권선언의 기본 내용을 알아보려 <인권하루소식>은 교육부에 문의해 보았다. 우리 부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반응을 몇 번 겪은 후에 학생인권선언 담당자와 연결되었다. 그의 답변은 아직 ‘제정위원회’가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언의 내용은 현시점에서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선언이 제정된다면 언론홍보 등을 통해 여론환기의 효과가 클 것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교육부에서 지금부터 일주일 안에 제정위원회를 발족한다 하더라도 작업시간은 겨우 한 달밖에 없다. 그 짧은 시간에 처벌과 지도의 지침으로 삼겠다는 선언을 만들 수 있다니 의욕이 참으로 대단하다. 우리 나라 학생의 인권 상황에 대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믿을 만한 데이터를 수집한 선상에서 논의를 출발했는지 묻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한 달 동안에 기적을 이루겠다는 선언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한 발짝 물러나, 아주 대단한 열의가 있으니 시간은 그리 문제될게 없다고 생각해 본다.

그러면 한달 안에 선언을 기초해야 할 소위 ‘제정위원회’에는 누가 참여하는가? 학생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지 혹은 학생의 의견이 수렴될 여지가 있는지, 학부모와 일선교사의 의견은 어떤 식으로 반영될 수 있는지 현재로선 전혀 알 길이 없다. 이런 점이 전혀 검증이 안된 채 누가 됐든지 열심히 선언을 기초하라고 독려하면 되는 것인가?

누가 만들던 내용만 알차면 된다고 치자. 그러나 내용이 아무리 알차다 할지라도 선언은 선언일 뿐이다. 교육부는 선언을 위반하는 학생과 교사에 대해 가중 처벌하겠다고 했는데 어떤 근거로 ‘선언’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말인가? 법에 의하지 않고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은 기초상식이 아닌가? 학생을 권리의 주인이 아니라 부모의 소유이자 교사의 지도와 처벌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법 조항을 손실하지 않으면서, 정부가 서명하고 비준한 국제조약인 ‘유엔 어린이․청소년 권리조약’을 전혀 써먹지 않으면서 ‘선언’을 들고 나온다면 그 선언이 과연 우리 사회에서 도덕적 권위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또한 학생인권선언의 기본적 내용도 잡혀 있지 않은 상황이라 판단하긴 어렵지만, 신문과 방송 보도에서 언급한 ‘학교폭력과 교사체벌, 성차별’을 주요하게 다루는 선언이라면 학생이 누려야 할 기본적 인권을 너무나 협소하게 해석한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선언의 제정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우리 나라에서 푸대접받고 있는 ‘유엔 어린이․청소년권리조약’의 존재이다. 89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이 조약은 5대 원칙의 ‘1924년 아동의 권리선언(일명 제네바선언)’을 시작으로 7대 원칙의 1948년 선언, 10대 원칙의 1959년 선언을 거치는 동안에 변화되어 온 아동의 권리에 대한 인류의 인식을 담고 있다. 즉, 아동은 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인식을 담은 것이 선언이었다면 아동이 권리의 주인이라는 원칙 위에 구속력을 가지게 된 약속이 조약이 되었다. 이 조약은 인류가 인권에 대해 쌓아온 지식과 경험을 총결산하여 제정한 세계최대의 국제인권조약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 나라는 지난 91년 12월 20일에 이 조약의 당사국이 되었다. 따라서 이 조약에 대해 교육해야할 뿐더러 국내이행을 위하여 법적․제도적․행정적 및 기타의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조약의 국내 이행을 위한 가시적인 당국의 노력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가 96년, 한국 정부에 제시한 32개항의 권고사항의 이행여부를 알아보고자 작년 어린이날을 기해 필자는 한 국회의원 실을 통해 관계 부처에 질의서를 보냈다. 답변을 분석한 결과 정부대표가 유엔아동권리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여 조속한 조치를 약속한 사항조차도 이행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학생인권선언을 제정한다니 다시 묻고 싶다. 이 조약을 일선학교에 제대로 보급하려는 노력을 한 일이 있는지 그 흔한 교사연수에서 교육 내용에 포함시킨 일이 있는지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 난데없이 학생인권선언을 제정한다는 발상은 세계인권선언 50주년에 꿰어 맞추는 한판 시늉에 불과한 것이 분명하다. 정작 권리의 당사자인 학생들은 무슨 말을 할까? “그거, 또 외우는 건가요?”라고 물어보지 않을까?

류은숙(인권운동사랑방 인권교육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