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등록번호를 잊자
너 몇살이야? 어디 주민등록증 꺼내봐'
몇년이 아니라 몇개월까지 계산하여 '나이'를 따지기 좋아하는 우리 사회에서 흔히 써먹는 말이다.
주민등록번호만 대면 '과연 몇 살인가'가 뚝딱 나온다. 주민등록번호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생년월일, 출생지, 성별'을 숨길 재간은 없다.
'카드를 분실했는데요' '카드 번호는요?' '잘 모르겠어요' '그럼, 주민등록번호 대세요'
곤란할 게 없다. 주민등록번호만 대면 '나'라는 '존재'가 금방 확인된다. 이런 저런 컴퓨터망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있는 나의 고유번호이기 때문이다.
'검문 중입니다. 주민등록증 좀 보여주시죠' '저, 지금 없는데요' '그럼, 주민등록번호 대세요'
경찰관이 무전기에 대고 '나의 번호'를 두드린다. 그럼 무전기 건너편에서 나는 '나'로 확인되어 날라온다. 이처럼 '나'는 무수한 일련번호 속의 하나로 관리되고 있다.
이처럼 개인에 대한 파악, 정보수집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한 일상적인 감시체계를 작동시키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굴종을 강요하는 도구로써 주민등록번호는 기능하고 있다.
독일 헌법재판소는 '국가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인격에 관한 모든 것을 강제적으로 등록시키고 목록화 함으로써 재고조사가 가능한 하나의 물건처럼 인간을 취급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합치하지 않는다'라고 판단한 적이 있다.
그러나, '간첩이나 불순분자를 용이하게 식별, 색출하여 반공태세를 강화하기 위하여'라는 목적하에 엉겁결에 고유번호를 하사(?)받은 우리 국민은 이 번호가 나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생각을 꿈에도 해보지 못하고 수십년을 보냈다.
우리가 이 고유번호를 당연하게 알고 암기하고 요구받을 때마다 뱉어놓는 동안 정부는 전국 어디에서나 '나'를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버렸다.
그래서 어디서건 나는 나의 번호를 읖조림으로써 '나'임을 증명하게 된것이다. 더구나 수십년간 우리를 길들여온 이 번호는 명확한 법률 규정이 아닌 한갖 '시행령'에 기대고 있다.
국가신분증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나라가 많기는 하나, 우리처럼 많은 통제장치를 갖춘 데는 없다.
'전국민고유번호제'에다 '전국민강제발급', 국민이 거주지와 거주지를 이동할 때마다 '강제등록'을 하도록 하는 3개의 제도를 동시에 운영하는 경우는 우리가 유일하다.
그리고, 이를 이용한 정보의 수집과 분류, 확대, 적용을 편리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주민등록번호이다.
우리 국민 개개인에 대한 어떤 정보든지 유기적으로 묶어 버릴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무서운 열쇠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민등록번호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 디지털화된 주민등록증이 만들어진다면 '나를 열어보세요'라는 말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