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기자다보니 독자들의 전화를 받을 때가 종종 있다. ‘동성애’ 관련 기사를 쓰면 독자들의 전화가 유독 많이 걸려온다. 반응도 극에서 극을 달린다.
얼마 전 동성애를 성도착증 또는 후천성면역결핍증 발병 원인행동이라 기술한 교과서 내용의 수정을 요구한 동성애인권운동가를 소개한 적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전화가 폭주했다. “한겨레신문 더 이상 못 보겠다.” 창간 주주이자 창간 때부터 정기독자라는 한 아저씨는 격분한 듯, 전화에 대고 마구 퍼부어 댔다. ‘“동성애를 권장하는 것이냐, 아이들이 보면 어쩔테냐”는 게 비판의 요지였다. 그 독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동성애는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성적 지향이고, 소수자들도 다른 이들과 같이 살 권리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 뒤로도 많은 전화가 걸려왔다. 그 대부분은 이런 거였다. “기사에 나온 분 연락처나 단체 전화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 아주 조심스럽게,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언급하지 않은 채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또 슬펐다. 아마도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힘겨워 하는 동성애자이리라….
이 자리에서 동성애에 대해 가타부타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우리사회를 뒤덮고 있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무시로 타인과 이질적 집단을 향해 적대적인 태도로 드러나는, 그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정말 두렵다는 말이 하고 싶다. 동성애 뿐 만이 아니다. 동남아 등지에서 온 이주노동자들과 조선족 동포들이 겪고 있는 비인간적인 삶, 탈북주민들에 대한 폄하의식…. 아시아에서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는 한국뿐이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의 인구는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자장면 장사밖에 할 수 없는’ 한국에서 사는 게 너무 고단하기 때문이란다. 난 이런 우울한 풍경에서 ‘5천년 단일민족’의 힘보다는 장벽을 치고 살아가는 폐쇄성을 본다. 그러나 ‘톨레랑스’(관용)가 불가능한 우리의 모습을 집단심성 탓으로 돌리는 건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파쇼를 닮아가는 민중’이라고 했던가.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군사독재정권 치하 30여년, 생각할 자유조차 옥죄는 국가보안법…. 억눌린 답답함은 때때로 엉뚱한 대상을 향해 폭발한다. ‘타인에게 모욕당하기 전에 스스로를 모욕하는’ 우리의 초상이 슬프다.
이제훈(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