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언론과 인권 NGO(민간단체)의 최고 관심사는 동티모르다. NGO의 성명서 발표와 시위, 김대중 대통령의 동티모르 관련 발언, 파병을 둘러싼 논쟁…. 얼핏 70년대 초, 월남전 파병을 둘러싼 대논쟁을 연상케 한다.
사실 동티모르 문제는 요즘 국제정치와 국제인권운동의 최대 화두임이 분명하다. 코소보의 인도주의적 개입이 반쪽 ‘실패’ 또는 반쪽 ‘성공’인데 반해 동티모르에 대한 개입은 분명한 대의명분과 우호적인 국제정치적 환경속에 진행되고 있다. 비록 희생은 컸지만 동티모르 민중의 자결권 획득과 독립은 이와 유사한 환경에 있는 수많은 소수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이다. 한편에서는 지금까지 국제정치를 지배하던 현실정치 논리에 대한 ‘인권정치’의 역사적 승리라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국제적 압력속에 인도네시아 정부가 평화유지군을 받기로 결정하자 인도네시아의 눈치를 보며 동티모르 문제를 외면하던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앞 다투어 파병의사를 천명했다. 사실 벨로 주교와 함께 96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독립운동 지도자 조세 라모스 호르타 씨가 작년 8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정부는 국익을 이유로 그의 면담 신청을 거부했었다. 그러던 정부가 새롭게 ‘국익’을 계산하는 방법을 개발했는지 지금은 파병, 그것도 인명의 손실을 각오해야 하는 전투병력 파견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현실변화다.
국익계산에 따른 파병
한편 명동성당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신부들의 단식이 10일째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인권 NGO와 국회에서도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얼핏 보기엔 전혀 성질이 다른 두 이슈이지만 필자는 두 문제가 국내외적으로 긴밀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첫째, 동티모르의 비극은 식민제국주의의 산물이지만 또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독재정권을 지탱해준 국가안보 이데올로기, 즉 국가보안법의 결과이다. 국가보안법은 엄밀하겐 ‘정권보안법’에 불과하다. 전세계 비민주, 독재국가에 한국과 같은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군사정권의 성격이 강한 인도네시아의 경우 우리보다 국가보안법의 폐해가 심각하다. 75년 동티모르에 대한 무력침공 이후 숱한 인권침해를 정당화해 준 것은 바로 국가안보 이데올로기, 즉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국가안보가 아닌 인간안보가 더 중요시되는 상황이다. 동티모르 사태는 이제 국제정치에서 인권, 인도주의 등의 인간안보가 국가안보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민 개개인의 인간안보를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는 외국의 군대를 자국 땅에 불러올 수밖에 없는 ‘수모’를 당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는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 특히 아시아 지역의 민주화 및 인권운동에 매우 중요한 의미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제적인 ‘인권대통령’ 이미지가 보여주듯 전세계적으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가 개인적인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국내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는 현실이 될지의 여부는 바로 국가보안법 폐지에 달려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통해 국가안보와 인간안보의 어정쩡한 타협과 절충이 아닌 인간안보로 한걸음 나설 때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인권신장을 이끌어 나가는 ‘인권선진국’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한국정부의 동티모르 파병결정의 주된 배경은 유엔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입장에서 동티모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유엔의 입장을 생각할 때 필자는 파병을 찬성한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유엔 요청을 받아들임에 있어 자의적이고 이중적인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이중잣대의 적용
유엔의 인권이사회는 92년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인권침해의 구조적 뿌리라며 ‘단계적 철폐’를 권고했고, 95년 의사표현의 자유에 관한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은 한국을 방문해 인권상황을 조사한 후 ‘국가보안법 철폐’를 권고했다. 벌써 오래된 얘기다. 동티모로 파병이 경제위기 하에 큰 규모의 국민세금으로 충당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불과 몇일만에 결정한 것에 비한다면 또 다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정부와 일부 정치인의 발상전환이 필요할 뿐, 예산은 커녕 오히려 재정 지출을 축소하는 경제적 이득과 ‘인권선진국’으로서의 ‘국위선양’의 이미지 효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유엔에 대한 이중기준 적용이 실망스러울 뿐이다.
한국은 92년 유엔에 가입한 이후 유엔의 여러 국제인권조약에 ‘자발적’으로 가입했다. 국제인권법에 따라 도덕적 법적 의무를 성실히 지키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지난 4년간 한국정부는 ‘도덕적 해이’에 빠져 있었거나 위법행위를 했다. 이는 유엔의 권고를 무시한 전형적인 ‘인권후진국’의 행태이다.
동티모르 파병이 유엔의 요청에 따른 보편적 인권과 인도주의 따른 것이라면 같은 논리로 국내의 국가보안법 철폐도 즉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동티모르 문제의 원인인 인도네시아의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한국정부의 인권외교는 아무리 명분이 좋다해도 반쪽의 성공일 수밖에 없으며,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결코 ‘인권선진국’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이성훈(팍스로마나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