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기고> 동티모르, 미래를 위한 끝나지 않은 투쟁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의 해변에는 유조선만한 배 두 척이 떠있다. '올림피아 호텔'이라고 이름 붙은 이 배는 주로 외교관이나, 유엔직원, 또는 호주의 사업가들이 이용하고 있다. 이 배의 카지노의 불은 밤새 꺼질 줄 모른다. 반면 딜리 시내는 밤 10시만 되면 도시전체가 암흑으로 빠진다. 그 배에서 밤새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면서 동티모르인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딜리에 도착해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띠바르 지역에 있는 쓰레기 매립장이었다. 딜리 시내에서 약 30분 가량 떨어진 이 매립장엔 거대한 쓰레기더미들만이 산같이 쌓여 있다. 우리를 안내한 칼리토의 설명에 의하면 인도네시아 점령 당시에 이곳은 재활용시설까지 갖춘 꽤나 정형적인 매립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말 그대로 쓰레기더미가 되어 버렸다. 그곳은 유엔 과도행정기구(UNTAET) 건물에서 나오는 거대한 쓰레기들이 아무런 감시나 처리없이 버려지고, 그 쓰레기를 뒤져 쓸만한 물건들을 찾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그 아이들이 쓰고 버린 물건은 또 다른 아이들의 손에 넘어간다. "이곳의 물건은 중고품이 아니라 골동품쯤 될 거다"는 칼리토의 자조적인 설명이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아태지역동티모르연대 사무국의 머시는 이곳의 사진을 찍어 당장 그린피스에 보내자고 제안했고, 맘좋은 버마 아저씨 테디는 UNTAET를 불태워 이곳에 갖다 버리자는 말로 비참한 슬픔을 대신했다.

주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결정한 이후 동티모르에서는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의 만행으로 동티모르 전역의 약 80%가 파괴되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은 거의 모두 민병대의 만행으로 불에 타 앙상한 기둥과 벽만 남았고, 가족과 집과 삶의 터전을 잃은 약 50만명의 주민들(전체 인구는 약 70만 정도)은 민병대의 만행을 피해 서티모르로, 인도네시아로 그리고 인근의 다른 섬으로 피신했다. 그 후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되고 UNTAET가 들어서고, 동티모르는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으리라. 우리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UNTAET가 들어온 지 일 년이 지났지만, 불타 파괴된 집과 건물들이 복구되는 광경을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함석과 널빤지 조각, 또는 커다란 야자수 잎으로 얼기설기 엮고 살아갈 뿐이다. 70%가 넘는 주민들이 직업이 없을 뿐만 아니라, 편히 쉴만한 장소도 없어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하고, 학교나 병원, 전력시설과 같은 사회기반시설들도 태부족이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지방으로 갈수록 더욱 열악해 많은 국민들이 딜리로 모여든다고 한다.

동티모르는 지금도 전쟁 아닌 전쟁 중이다. 서티모르로 피신했던 주민들 중 약 10만명은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과거 학살과 파괴에 가담했던 민병대들을 체포하거나 재판하거나, 혹은 잡아가둘 수 있는 사법절차나 시설마저도 없다. 이제 막 영국에서 파견된 판사들에 의해 약 10명의 젊은이들이 사법교육을 받고 있긴 하지만, UNTAET의 행정력으로는 무망하기만 하다. 병원시설도 UNTAET에서 운영하는 것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그것마저 주로 UNTAET 직원들이 차지할 뿐 주민들에게 돌아갈 기회는 많지 않다. 대다수의 주민들은 국제 민간단체들이 운영하는, 시설이 미비한 병원에서 간신히 치료를 받을 뿐이다. 현재 동티모르인 의사는 모두 23명으로, 인구 10만명당 3명 정도의 의사가 있을 뿐이다. 인도네시아가 10만명당 12명, 호주가 10만명당 240명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교육, 행정, 보건의료, 농업, 사법, 치안 등 모든 공적, 사적 영역을 인도네시아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동티모르에서, 이들이 모두 인도네시아로 돌아간 이후 사실상 동티모르인들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 보였다.

동티모르는 지금 국가와 시민사회를 동시에 건설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함께 나눌 경험과 자원이 너무도 부족하다. 현재 동티모르에는 약 150여 개의 민간단체들이 있지만, 그들이 절실히 바라는 것 중의 하나는 경험을 가진 민간단체들과의 교류이다. 그들은 아무런 토대도 없는 가운데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반면 한국은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경험의 내용마저도 비슷하다. 단순한 경제적 지원이나 전투병의 파병을 넘어서, 이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우리의 승리와 실패의 소중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우리가 동티모르의 시민사회를 건설하는데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