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우발적 사건이지 미군 당국의 명령에 의해 저질러진 의도적인 학살은 아니다." 지난 12일, 한미 양국이 공동 발표한 '노근리 조사보고서'의 요지다.
미군은 자신들의 조사가 객관적이고 치밀하다는 근거로 "150여명을 면담하고 100만쪽 이상의 문서를 검토"했다고 하는 등 곳곳에서 숫자를 동원한다. 그러나, 핵심은 물량이 아니라 직접적 증거가 될 24사단 7기병연대 문서다. 미군 당국은 다른 부대 문서는 그토록 잘 찾아냈으면서도 7연대 문서 중 핵심 기록은 분실했다고 밝혔다. 정황 증거도 배척했다.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하고 사격하라"는 일반지침, 로저스 대령 메모 등 정황 증거는 많았다. 하지만 미군 당국은 이들을 싹 무시하고, 피해자와 미군 일부 병사 증언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철저한 '문서 증거주의'로 일관하던 보고서는 어느 순간 다른 얼굴로 바뀐다. 미군이 피난민을 학살한 동기가 북한군이 피난민 속에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병사들의 심리적 공포 때문이었다는 점을 강변하기 위해 참전 병사 몇몇의 증언(!)을 동원한 것이다.
결국 미국은 노근리 사건을 전쟁중 흔히 발생하는 우발적 사건으로 결론 지었다. 그러나 노근리의 민간인은 우연히 날아온 총탄에 재수 없이 심장을 관통 당한 게 아니다. 철로 위에서 공중 기총 공격을 당하고, 쫓겨 들어간 쌍굴 안에서 무려 4일간 무차별 사격을 당했다. 정규군이 무려 4일 동안 무차별 살상을 해놓고도 '우발적 행위'라 우길 수 있는 강심장이 부럽다.
우리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갔다. 한미우호관계라는 국익을 위해 피해자들에겐 이제 참으라고 넌지시 권한다. '너만 조용하면 모두가 편하잖아'라고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분명히 하자. 국익의 뿌리는 국민 개개인이다.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인권을 외면한 채 존재하는 국익이란 다 거짓부렁이다. 정부는 허구의 국익보호를 명분으로 한 미국과의 정치적 거래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무고하게 죽은 자가 있고, 가해자도 있다. 가해자는 진상규명의 뚜껑을 '유감'으로 막았다고 자위하겠지만, 피해자들에게 그 뚜껑은 결코 이대로 덮을 수 없는 것이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그것 없이 진실이 봉합되는 일은 제2의 학살이요 범죄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