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공작이 몰고 온 죽음들
98년 8월 '준법서약제'로 그 겉모습을 바꿀 때까지 65년 간 양심의 자유를 유린해온 사상전향제. 특히 73년부터 몇 년 간 전향공작의 야만성은 극에 달했다. 당시는 53년부터 55년 사이 구속된 상당수 좌익수들이 4·19 혁명 이후 20년형으로 감형받고 만기출소를 기다리던 때다. 법무부는 73년 6월 전향공작전담반을 공개채용, 같은 해 8월 6일 대전·대구·전주·광주 교도소 등 4개 교도소에 배치해 좌익수형자에게 집중적으로 전향공작을 시행했다. 그리고 60년 출범 이후 좌익수를 관리해온 중앙정보부는 이 과정을 모두 보고 받으며 조정·통제했다.
<대전교도소>
4개 교도소 중 최초로 73년 8월부터 일반 재소자(폭력사범)를 동원한 전향공작을 시행했다. 폭력사범 조모 씨는 격리사동 1방에서 좌익수형자를 폭행, 전향을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최석기, 박융서 씨 등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최근 의문사진상규명위 발표에 따르면, 최 씨는 74년 4월 4일 조모 씨 등에 의해 몸 전체를 구타당했고, 같은 날 밤 사망하고 말았다. 또 박 씨는 같은 해 7월 19일 사방청소부 이모 씨로부터 전신을 바늘로 찔리는 고문을 당하며 전향을 강요당했다. 당시엔 일반수형자 중 선발된 사방청소부 역시 전향공작에 동원됐다. 박 씨는 고문을 당한 이튿날 새벽 자신의 동맥을 절단해 자살했다.
<광주교도소>
광주교도소에서는 73년 10월부터 그 이듬해 초까지 폭력재소자, 일명 '떡봉' 정무종, 원삼실을 배치, 로프로 똬리를 만들어 내리치기, 물고문 등 갖은 고문을 동원해 전향을 강요했다.
75년도부턴 사방청소부 전모 씨, 이모 씨가 규율위반 등을 구실 삼아 비전향자들을 구타했고, 교무과에 불려가 맞는 것이 다음 수순이었다.
"교무과에서 머리를 많이 두들겨 맞아 정신이 흐릿해질 정도였어. 그리곤 저녁에 자신의 옷을 찢어 목을 달았어." 김영승 씨에 따르면, 75년 11월 22일 신춘복 씨는 이렇게 죽었다. 76년 5월 21일 사망한 최한석 씨 경우 "심장·위장병에 고혈압까지 있었으니 완전 병자였어. 근데, 전향을 않는다고 치료도 안 해주면서 '직싸게' 때렸던가봐. 앓는 소리가 났는데, 사방청소부 이 씨는 '꾀병'이라고 한 거야. 결국 그 날 1시간쯤 있다 죽었다." 교도소 당국은 질병 역시 전향강요의 큰 미끼로 이용했던 것이다. 위장병을 앓았던 김규호 씨 역시 약의 차입을 요구하다 교무과에서 심하게 구타당하고 76년 6월 저녁 목을 매고 자살했다.
<대구교도소>
사방청소부를 비전향 좌익수들을 폭행, 협박하는 등의 전향공작에 동원한건 마찬가지. 당시 이곳에서 죽은 사람 중 한 명이 손윤규 씨다. 고혈압과 위궤양 등에 시달렸던 손 씨는 76년 3월 24일 전향공작전담반에 의해 실신상태에 이르기까지 폭행을 당했다. 이에 항의, 단식에 들어간 손 씨에게 교도소는 강제급식을 실시, 손 씨는 건강상태가 악화돼 사망하고야 말았다.
<전주교도소>
이곳에선 가혹한 전향공작 전력이 있는 강모 교무과장 등이 부임한 78년 10월 이후 전향공작이 본격화됐다. "탁해섭 선생이 늦도록 들어오는 게 안 보였는데, 알고 보니, 한윤덕 교회사가 탁 선생한테 모진 테러를 가한 거였어요." 안학섭 씨는 당시 교도관과 다른 재소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풀어놨다. "병사 2층 독방에서 매일 때렸다고 해요. 자결을 하려고 벽을 받아, 머리가 으스러질 정도가 됐대요. 그러니까 보호모를 씌우고 혁수정을 채우고 또 때리고. 죽을 방법도 없잖아요. 여드레 됐을 때, 탁 선생이 '전향이란 마음의 문젠 데 생각해볼 수 있게 (혁수정을) 끌러달라'고 했대요." 그리고 이후, 탁 씨는 목을 매 죽은 채 발견됐다. "'사람이 고귀한 것이 양심이 있다는 건데, 자신의 양심을 속이면서 마음의 부담이 돼 어떻게 살 수 있나'라는 말을 남겼다고 들었어요."
75년에는 사회안전법이 제정, 형기가 만료됐음에도 비전향한 사람들은 보안감호처분을 받고 다시 끝모를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청주보안감호소는 "전향 안 하면, 세상에 못 나간다"는 걸 보여주는 본보기였던 셈.
<청주보안감호소>
이상률 씨는 80년대 초반부터 자주 쓰러지곤 했다. 감호소 당국은 이를 꾀병이라며 방치했다. 몇년이 지난 후 처음 뇌사진 촬영을 받아보니 이 씨의 병은 뇌낭충증이었다. "자꾸 자뿌러지는데 치료도 안 해주고, 약도 제대로 안 주고. 나중엔 똥, 오줌도 가릴 수가 없었어." 그럼에도 감호소 측은 이 씨를 내보내지 않았음은 물론, 끝까지 독거 수용했다고 김영승 씨는 말한다. '전향만 하면 병사에 입원시키고, 형집행정지로 내보낼 수도 있다'는 회유는 끊임이 없었다. 결국 이 씨는 87년 2월 의식불명이 된 후에야 감호소를 나갈 수 있었다. 앞서 80년 7월엔 감호소의 부당한 처우에 항의, 단식농성을 하던 이들에게 강제급식을 강행 변형만, 김용성 씨가 사망하기도 했다.
최근 장기수 모임 '통일광장'은 65년부터 89년까지 총 73명의 장기수들이 감옥에서 죽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실제 죽은 이들의 수는 이보다 좀 더 많을 거라고도 한다. 그나마 이들 중에서도 명백히 사인이 밝혀진 경우는 최근 의문사위가 조사한 최석기, 박융서, 손윤규, 변형만, 김용성 씨 뿐이고, 나머지 사람들의 사인은 당시 동료 재소자들의 증언을 통해 일부만 알려졌을 뿐이다. 그러나 강제 전향공작과 수십 년 간의 장기구금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이들 모두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점은 어찌됐든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