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뛰기하는 법의 잣대
87년 봄 그 분노의 함성을 불러일으켰던 끔찍한 고문치사사건이 떠오른다. 한 젊은이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있었고, 사건을 은폐하려던 공권력의 검은 커넥션이 있었고, 이들을 감싸고돌던 정권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젊은이의 억울한 죽음은 세상에 알려졌고, 살인을 저지른 수사관들은 단죄를 받았으며, 정권은 성난 민중 앞에 무릎을 꿇었다. 15년이 흐른 지금, 수사과정에서 고문치사가 다시 일어났으며, 수사관계자들이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정권은? 정권은 여론의 눈치를 보고 있다.
물론 15년 전 사건과는 다른 점이 있다. 이번에 죽은 사람은 조직폭력배이고 살인사건에 연루돼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피의자의 고문치사도 경찰이 아니라 검찰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사건은 어디까지나 '수사 중'이었고, 죄 값은 수사의 종결과 함께 치러질 일이었다. 형사법의 원칙 중엔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 의심이 되더라도 그 죄를 지었음을 확인하기 전까진 죄 없는 사람으로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뒷골목을 배회하며, 능력도 빽도 없이 오직 힘만 믿고 까불었던 사람에게 이러한 원칙은 '가끔' 예외를 발휘하나 보다. 범법자에 대한 수사기관의 처분은 이처럼 때로는 가혹하다.
어떤 이에게는 가혹한 수사기관의 수사방식도 사람에 따라선 봄날의 순풍처럼 따사롭기 그지없다. 10월 25일 검찰은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이회창씨의 아들 병역비리 의혹에 대해 증거가 없다거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수사를 서둘러 종결했다. 검찰 수사대로라면 이 사건은 말 그대로 한 순간의 바람(風)일 뿐이었던 것이다.
검찰의 수사행태엔 심각한 문제점이 존재했다. 사건과 직접 관련 있는 당사자는 제보자인 김대업씨를 제외하곤 제대로 심문수사조차 진행하지 않았고 녹음테이프의 진위여부에 관해선 일부언론의 눈치를 보며 오락가락 하질 않나, 병적기록부에 대해서 역시 정밀한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해야 한다. 이 원칙이 무시될 때, 법의 권위는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사회의 합의는 무너진다. 따라서 법을 집행하는 기관은 언제나 공정하고 평등하게 법을 집행해야만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그런데 사회 곳곳에서 이처럼 중대한 의무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 공명정대해야할 법이 신의 아들과 어둠의 자식에 대해 이중의 잣대를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검찰청법 제4조2항은 "검사는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며 부여된 권한을 남용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검사는 때로는 국민 일부에 대한 봉사를 우선하며, 정치적으로 재빠른 줄타기를 감행하며, 아주 가끔은 부여되지도 않은 권한까지 사용한다. 법은 법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그 결과 법은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사람은 타고난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의하여 대접이 달라진다. 어떤 놈은 죽고, 어떤 분은 살고.
(윤현식, 지문날인반대연대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