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청산 없이 민주화의 완성도 없다
2003년 계미년 새해가 밝은 지 벌써 두 달째 되고 있다. 그리고 전 국민적 기대를 받고 있는 노무현 정권이 드디어 들어섰다. 그런가 하면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을 인권운동 차원에서 전개한 지도 벌써 3년이 지나고 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었어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전선은 새 정부의 공약과 정책, 하물며 인수위원회 과제에도 끼지 못한 것 같아 자못 우울하기만 하다. 반세기 전 이 땅 남한 사회 인권 문제의 시발점이랄 수 있는 민간인 집단학살 문제는 여전히 전 사회적 공감대와 여론을 형성하지 못한 채 또다시 수많은 민생 현안에 파묻혀 질식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자못 비상한 긴장과 각오를 들게 만들고 있지 않나 싶다.
우리 옛말에 '우는 애라야 젖 준다'는 말이 있다. 자식은 많고 먹을 양식은 적어 손 볼 자식 사랑은 한계가 있어 나온 얘기일 게다. 민간인학살 피학살자 유족들의 처지가 꼭 그 모양 같다. 그러나 반세기 전 통한의 슬픔을 부여안고 구천을 떠도는 고혼들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묻혀지고 왜곡된 이 땅의 역사를 바로잡고 국가 도덕성을 올바로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과거 청산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청산 없이 이 땅의 민주화의 완성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남한 사회 권력의 뿌리는 주로 일제 식민지 지배나 한국전쟁 전후의 좌우익 갈등의 산물로써, 이는 어김없이 친일세력과 극우 세력들인 것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 그들이 지난 반세기 동안 끊임없이 중앙과 지방을 아우르는, 이른바 학살권력을 재생산하다 보니 전 사회적인 민주화와 인권의 사회적 확산이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피학살자들과 유족들은 이 땅에서 민족의 운명과 생사를 함께 하는 민족공동체의 일원이다. 한 몸이어야 할 민족공동체의 일원이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소위 '아군'에 의해 집단학살을 당한 것이 사실이건만, 여전히 민족사회 전반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주검과 시체를 온 적막강산에 유기한 채로 아직도 유교적 정서가 진한 이 땅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한 회의가 드는 것은 혹여 세상을 잘못 살아서일까?
이제 시간이 별로 없다. 살아남은 유족들도 고령화로 인해 하루가 다르게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새롭게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남한 인권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위해, 국가 도덕성과 사회 건강성의 회복을 위해서, 아니 민주화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이 문제는 반드시 풀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노무현 대통령 자신도 그의 장인과 중학교 은사, 친인척 중에도 이로 인한 피해자가 있는 줄로 안다. 그 만큼 이 문제는 민족사회 전반의 일반적인 사건인 것이며, 그러기에 이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살아있는 유족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또한 이는 단순한 과거청산의 문제만도 아니듯, 이 땅 모든 민족공동체의 일원이 민간인학살 문제를 진실되게 인권문제로 인식을 같이하고 풀어야 할 과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영일 씨는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