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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3·8 세계 여성의 날 특집 ③> 여성과 장애 <끝>

여성과 장애라는 이중 억압이 낳는 잔혹한 일상


여성이자 장애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최근 성남시 중동의 한 유흥주점에서 19살의 두 장애여성이 성매매를 강요당하는 것은 물론, 감금과 상습적인 폭력에 시달려왔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큰 충격을 준 바 있다. '지체장애'를 가진 한 여성은 친구들의 따돌림과 구타를 견디다 못해 가출, 유흥업소를 전전하다 이곳까지 오게 됐다고 한다. 또 다른 정신지체 장애여성은 남들보다 몇 배나 싼값으로 팔려온 후, 행동이 느리다는 이유로 업주와 연계된 조직원들(속칭 '삼촌')들로부터 분뇨까지 먹이는 상습적인 폭력을 당해 왔다. 이 사건은 장애여성이 처한 '잔혹한' 현실을 응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장애계에서는 장애인이 전체 인구의 10%라고 보는 세계보건기구의 기준에 따라 전체 장애인을 450만, 장애여성은 그중 45%인 20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6월말 현재 장애인복지법 상 등록된 장애인 수는 총 120만 정도, 그중 장애여성은 40만 정도에 불과하다. 이렇듯 통계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 것은 많은 장애인들이 사회와 단절된 채 살아가고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차별에다 일상적 성폭력까지

장애여성들은 장애인이자 여성으로서 이중적인 차별의 굴레에 놓여있다. 한 예로 보건복지부와 보건사회연구원의 <2002년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무학이거나 초등학교 이하의 학력을 가진 장애인 중 남성은 41.4%인 데 반해, 여성은 67.7%에 달한다.

여기에다 장애여성은 성폭력이라는 또 다른 심각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대다수의 성폭력이 이웃이나 아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고, 장기간 동안 지속된다. 2000년 강릉에서 마을 남성 7명에 의해 7년간이나 성폭력을 당해 온 것으로 밝혀진 정신지체 장애여성 김모 씨의 사례는 장애여성, 특히 성폭력에 대한 인지능력이 낮거나 저항하기 어려운 정신지체나 중증장애를 가진 여성들을 대상으로 자행되는 비열한 폭력의 실태를 잘 보여준다.

게다가 성폭력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원래 걔가 밝힌다"라는 식으로 피해자를 2차 가해하는 경우도 많다. 장애여성공감 박영희 대표는 "특히 어려서부터 성폭력을 당해 온 정신지체 여성들은 과자부스러기 같은 대가를 받으면서 그것이 자신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며 이들에 대한 성교육과 보호대책 마련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거리에서 성폭력을 당하고 들어 온 딸들을 따뜻하게 감싸주기는커녕 오히려 패고 욕하는 부모들도 많다. 박 대표는 "많은 어머니들이 장애아를 낳은 게 모두 자기 탓이라 여기고 있고, 남편과 친척들로부터도 그런 취급을 당한다. 그러한 죄의식이 딸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중증장애 여성의 경우도 가족이나 자원봉사자에 의해 성폭력을 당해도 신고조차 못하는 예가 부지기수다. "중증장애 여성에게 그 사람들은 자신을 밖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끈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신고도 못한다. 더구나 가족이 가해자인 경우 가족을 떠나 살아갈 방도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감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박 대표는 말한다.

세상이 이렇다 보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장애를 가진 딸을 집안에만 묶어두는 부모들도 많다. 박 대표 역시 초등학교 2학년때 학교를 그만둔 이후 25살이 되어서야 바깥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주 부산에서 29살이 되도록 한번도 바깥에 나가 본 적 없는 한 장애여성을 만나고 온 후, 계속 마음이 무언가에 짓눌린 느낌"이라는 박 대표의 눈가에 눈물이 어린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까지 부정당해

장애여성을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장애인으로서만 바라보는 사회의 인식도 장애여성에게는 또다른 억압이 된다. "영화 <오아시스>에서처럼 장애여성들이 천사같은 존재로, '사회정화적' 이미지로 그려질 수 있는 이유는 장애여성을 무성적인 존재로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것이 박 대표의 주장이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규정된 장애여성에 대한 이미지들이 장애여성의 존재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도록 왜곡, 억압하는 힘으로 작용함은 물론이다. 장애여성의 출산, 양육, 육아를 지원하는 사회시스템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이 박 대표가 고집스레 여성'장애인'이 아니라 장애'여성'이라는 개념을 고집하고, '장애를 가진 여성의 독자성'에 주목하는 이유다.

"장애여성들은 어려서부터 나는 결혼 못할 사람, 다른 여성들과는 다르게 살아가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을 주입받고, 나중에는 이것이 스스로에게도 내면화된다. 초경을 시작할 때 가족들로부터 받는 첫 반응 역시 '애도 못 낳을 게, 시집도 못 갈 게 이게 뭐냐'라는 식의 반응이다. 그런 반응을 접하며 장애여성들은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상처를 받게 된다"고 박 대표는 말한다.

그렇게 장애여성들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끊임없이 부정하도록 강요받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힘들고,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기 위해 적극으로 나서지도 않는다. "장애여성들이 마음을 열고 자신이 겪은 억압의 경험들을 드러내고 스스로 표현하도록 만드는 것부터가 이미 운동"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운동사회 내부에도 폭력은 존재

운동사회 내부에서조차 장애여성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장애남성을 보조하는 부차적인 역할을 요구한다. 얼마 전 알려진 장애인이동권연대 전 사무국장인 엄모 씨에 의한 장애여성 성폭력 사례 역시 운동사회 내부에 장애여성을 동등한 한 인간이자 여성으로서 바라보는 인식이 부족함을 보여준다.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서 살아가다 보니 그게 곧 운동이 되더라"는 박 대표의 말은 장애여성이 처한 전쟁같은 잔혹한 일상을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장애여성에게도 삶은 전쟁이 아니라 존귀한 삶 그 자체여야 한다. 이는 여성이자 장애인으로서 겪는 이중 삼중의 억압에 우리가 귀기울이고 연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