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은 마네킹이 아니다
15일 지하철 5호선 답십리역으로 향했다. 오후 3시 서울지하철공사 본사 정문 앞에서 사람들과 만나기로 했는데, 전동휠체어를 사용하는 나로서는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 막연했다. 서울시장이 자랑(?)하는 장애인 전용택시는 나의 출발지 주변에서 이동하는 차량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분주한 마음으로 무조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난 10일 이규식(뇌성마비 지체1급) 씨가 동대문운동장 역에서 리프트가 고장나 역무원과 공익요원들과 행인의 도움으로 들려 내려오다 추락한 사건이 있었다. 서울지하철공사에 가는 이유는 이에 대한 우리들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답십리역에는 장애인이 이동하기 위한 어떤 시설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그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먼저 답십리역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내가 가겠다고 하자, 역무원은 수화기를 들고 말이 없었다. 답십리역 승강장에 내려 다시 전화를 하자, 잠시 후에 공익요원이 다섯 명 정도 나왔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단 한마디도 묻지 않고, "야, 네가 업고 가고, 우린 휠체어를 들고 가면 되겠다"라고 한다. 무수한 계단을 보며 나의 몸은 긴장되어 오기 시작했다.
무척 더워서 얇은 니트를 입고 있었는데 업혀간다는 것에 부담감이 들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나의 의사를 무시하는 태도에 더욱 화가 났다. 그래서 "잠깐만요, 나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고 묻지도 않고 지금 뭐하는 거죠? 나는 업혀가는 것보다 휠체어 채로 들려가야겠어요"라고 했다. 나의 생명을 다섯 사람들의 손에 맡긴 상태로 앞으로 금방 추락할 것 같은 위태로움을 느끼면서 휠체어를 부여잡은 손에 땀이 고인다.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손을 놓치게 되면...' 이런 끔직한 공포의 시간은 긴 계단과 비례한다. 이동할 때마다 일상처럼 경험하고 있지만, 언제나 극복(?)되지 않는 공포다.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서 무수한 계단 앞에서 여성임을 포기하고 업히거나 안겨야 하거나 아니면 목숨을 걸고 들려져야 한다. 이러한 공포스러움이 싫다면, 아예 집 밖으로 나오지 말고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만들어주는 대로 그 자리에 서서 행인들의 시선을 받으며 아무 존재감 없이 조용히 있어야 한다. 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내 의사를 표현하고 내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내 생명을 스스로 책임지는 인격적인 존재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나에게 이 사회는 한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 마네킹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라고 억압을 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이규식 씨 추락사건에 대한 항의 방문에 서울지하철공사는 정문을 굳게 닫고 공익요원들을 앞세워 놓은 채, 어떠한 책임있는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무책임한 태도가 또 한 사건을 유발시켰다. 14일 부천 송내역에서 장영섭(1급 시각장애인) 씨가 지하철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일년 전 어제는 발산역에서 윤재봉(지체장애 1급) 씨가 리프트 추락으로 목숨을 잃은 날이다. 일년 전의 사고를 세상은 잊어가고 장 씨의 죽음도 잊혀져 가겠지만, 매일 이동에 목숨 걸고 다녀야 하는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투쟁한다. "장애인에게 이동권은 생존권이다."
(박영희 님은 장애여성공감 대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