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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진보의련' 사건을 보면 국가보안법이 보인다 ①

해묵은 '색깔사냥'의 희생양

지난달 보건의료단체로는 처음으로 이적단체 판결을 받은 '진보의련' 사건의 항소심 첫 공판이 31일 열렸다. 21세기에도 계속 출몰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령의 본질을 이 사건을 통해 3회에 걸쳐 파헤쳐 본다. 사건 분석에 사법연수원생 오종열, 김해경 씨의 도움을 받았다. <편집자주>


"국가보안법이 죽은 조직 살려냈다."

지난 6월 4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이적단체로 규정된 '진보와 연대를 위한 보건의료연합'(아래 진보의련)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시 서울지방법원 제21형사부(황찬현 부장판사)는 이적단체 구성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던 제주대 의대 이상이 교수에 대해 징역 10월에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또 같은 혐의로 기소됐던 전 ㅈ보건소장 권정기 씨에 대해서도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의료 공공성 주장에 '이적' 철퇴

진보의련은 경희대 의과대학 출신 선후배들이 각종 무료 치료 활동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단체 활동을 펼쳐오다 95년 2월 정식 결성한 단체다. 현직 의사, 약사, 간호사 등 의료인을 회원으로 한 진보의련은 △공공의료 강화 △의료보험 통합 △의료보험료 인상 반대 △의료보험 본인부담 인하 등 지금도 많은 진보적 보건의료단체들이 주장하고 있는 내용과 같은 목소리를 내왔고, 국민이면 누구나 아플 때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보건의료의 사회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1999년 국회에서 통과된 '보건의료기본법'의 제정 취지와도 일치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진보의련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외부강사 초청 세미나 등 내부 학습을 진행하고, 보건의료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일정한 목소리를 내는 것 이외에는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내지 못했다. 그러던 가운데 모임을 주도했던 이상이 씨가 민주당의 전문위원과 대학교수로 재직하게 되면서 사실상 활동을 접게 되었고, 이후 권정기 씨도 보건소 등 지역사회에서의 공공의료활동에 집중해 왔다. 이후 진보의련은 2001년 6월 권정기 씨의 제안에 따라 해체를 결의하고 8월 사무실 폐쇄에 이어 2002년 1월 25일 공식적으로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런 조직에 '이적단체'라는 국가보안법의 철퇴가 내려지자,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은 "의료를 국가가 책임져야 하며 국민이 의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적을 이롭게 한다면,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우리도 이적단체"라며 법원의 판결을 강력 비판한 바 있다.


검찰 수사, 곳곳 무리수

진보의련 사건이 얼마나 짜맞추기 식이었는지는 검찰 수사과정만 들여다봐도 쉽게 드러난다. 검찰은 사무실마저 이미 폐쇄된 이후인 2001년 10월, 진보의련 관련자 8명을 긴급 체포하고 그 중 4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러나 법원의 영장실질심사 과정에서 영장 청구는 모두 기각됐다. 검찰이 다시 2명에 대한 영장을 신청하였지만, 이마저도 기각됐다. 결국 2002년 1월 검찰은 이상이 씨와 권정기 씨만을 불구속 기소하기에 이른다. '이적단체 구성'으로 기소된 피고인들의 재판이 불구속 상태에서 진행된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사건 관련자들은 수사과정에 있어서의 불법성도 지적한다. 당시 연행됐다 풀려난 라영찬 씨(한의사)는 "최초 연행된 직후, 수사기관은 이미 대외적으로 공개된 자료 외에 내부문건 등을 상당수 확보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회원들끼리 주고받은 이메일 내용까지 알고 있었다"며 1995년 창립 이후부터 회원들에 대한 미행과 감시, 불법 도청, 이메일 해킹 등이 이루어져 왔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럼에도 이후 검찰이 마치 적법한 압수수색을 통해 얻어낸 증거물처럼 위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어 실제 재판과정에서 쟁점화하기에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권 말기 '색깔' 사냥의 희생양

사건 관련자들과 사건 대책위는 진보의련이 정권 말기에 습관적으로 반복돼온 이른바 '색깔 사냥'의 희생양이었다고 분석한다. 김대중 정부 말기였던 당시, 이회창 후보의 당선이 예상되던 시점에서 '보험들기용'이 아니었냐는 것이다. 라영찬 씨도 "사회지도층이라 할 수 있는 의사계층에도 이적단체가 있음을 대외적으로 광고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처럼 진보의련 사건은 구속영장조차 수 차례 기각되는 등 초기부터 무리한 짜맞추기 수사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1심 재판부는 이들의 '주장' 자체를 문제삼아 유죄판결을 내렸다. 지금까지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이 항소심에서 뒤집힌 사례는 없다. 7월 31일부터 시작된 항소심 재판을 통해 이상이 씨와 권정기 씨는 최초의 선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